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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mzam May 25. 2021

지나온 시간과 경험들로 겹겹이 쌓인 개인의 고유한 퇴적층은 특별한 상대를 만남으로써 지금까지의 역사가 추출된다. 표면에 얹힌 껍데기만을 둘러보는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깊게 파고드는 개인에의 시추작업은 쉽게 착수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시절들을 보냈을 것이고, 각기 다른 관계들을 맺었을 것이며,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했을 것이다. 이것들로 쌓아 올린 스스로의 퇴적층 중에는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나고 숨기고 싶은 몇 겹의 구간도 있을 것이고, 여러 조건들과 시기가 아주 적절히 잘 맞아 들어 전시해두고 싶은 아름다운 구간도 있을 것이다. 본인의 역사에서 모든 구간이 거지 같을 수도, 모든 구간이 반짝거릴 수도 없으니, 개인의 겹들을 쌓아 올리는 것이 결국 삶이고,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완성될 고유의 퇴적층을 꼼꼼하게 관리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30년 동안 잘 관리된 한 사람의 태도, 가치관, 성격을 돈을 주고 구매한다면, 수백억 원은 족히 필요하지 않을까. 현재의 그는 그의 부모님의 양육태도, 아무도 모를 감정의 곡선, 스스로의 자아성찰, 또는 사랑하고 사랑받던 이와의 관계가 녹아든 것이다. 지금껏 쌓아 올린 그의 30년은 약간의 변수에 뒤틀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을 테니, 내가 사랑하는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이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표한다.


그가 엄청나게 숙련된 퇴적층 관리자라는 것은 그의 취미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러닝, 독서라는 특정한 취향에 쏟은 시간들이 잔잔히 쌓여 퇴적층을 만들었고, 지루해만 보이는 그 십수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엄청난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놀라웠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취미든, 무언갈 십수 년간, 혹은, 그 이상 꾸준히 좋아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매일 조금씩 묻히고 있다는 게 얼마나 멋있던지. 누적된 시간만큼, 이들에 대한 취향의 넓이와 깊이는 무한으로 확장되었다. 그와 특정 주제로 대화를 하면 쌓인 시간의 깊이를 찬찬히 느낄 수 있다. 내게도 그와 같은 면이 있을까. 다음 10년 후를 준비하기로 했다. 좀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이것저것 건드리며 헤집어 놓는 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평범 이상으로 케어하는 사람의 아우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누가 영화를, 책을 보는 걸 지루한 취미라 했던가. 정성을 쏟는 것만큼 대단한 caring이 있는가. 자기애가 아니라 대상에 이렇게 오랜 시간 사랑을 주는 건 어떤 마음인가.


그를 다시 만나, 그간의 공백을 하나 둘 채워갔다. 또박또박 잘 쓰였지만 열심히 읽다 잃어버려 다음 이야기를 알 수 없던 절판된 소설책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또는, 누군가의 용기로 그다음 이야기를 마저 읽을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서로에게 서로를 맡기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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