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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Oct 25. 2024

성북구립최만린미술관-주택가에 자리잡은 현대조각의 산실

미술관이 된 옛 건물 4

지금은 솔샘로라고 불리는 성북구 정릉동은 국민대학교와 서경대학교가 있는 대학가촌이다. 골목마다 대학 기숙사로 보이는 건물과 원룸촌이 곳곳에 자리 잡아 젊은 남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곳이 정릉동이라고 불리는 건 조선 초기 왕릉인 정릉이 있기 때문이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원래 신덕왕후의 무덤은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는데 전처소생인 태종 이방원이 왕이 되자 계모인 왕비의 무덤을 도성 밖인 지금의 성북구 정릉으로 이장했다. 그런 연유로 동네의 이름이 정릉이 되었다.


인도의 타지마할 같은 사연을 품은 왕비의 무덤도 있고, 전부터 경희대 다음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국민대학교 캠퍼스도 있고.. 무엇보다도 저 멀리 북악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이니 이 동네 주민들은 참 복 받았다는 느낌이 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릉 시장 인근에 맑은 정릉천도 흐르고 있어 주민들의 산책로로 각광받고 있다. 대체 이 동네에 없는 게 뭘까?

 


예전 정릉동 일대는 대규모 한옥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많이 들어섰다. 한옥들이 대거 사라져 아쉽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정겨운 옛 서울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한 정릉동 혹은 솔샘길. 이곳에 옛 주택을 개조한 작은 미술관이 하나 있다.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북한산보국문역에 내려 살짝 경사진 골목으로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한국 현대조각 1세대에 꼽히는 최만린(1935~2020)의 작품을 담은 아담한 미술관이 주택가 골목 안에 자리 잡고 있어 동네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이란 간판을 단 이곳은 작가가 1988년부터 2018년까지 30년간 거주했던 안식처이자 작업실이었다. 이 집을 2019년 성북구에서 매입해 성북구립미술관 분관으로 조성했다. 지역문화의 자산가치를 발견하고 공공건축물로 기획해 시민들의 문화시설로 돌려준 성북구의 노력은 2020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건물은 전형적인 1980년대 부잣집 혹은 양옥집 형태를 띠고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2층 주택을 리모델링한 건지 2층 규모의  층고 높은 천장과 시원하게 뚫린 통창이 탁 트인 개방감을 준다. 거기다 우아한 목제 계단과 아치형 문틀, 붉은 벽돌이 조화를 이뤄 옛 집의 정감 있는 모습을 지닌 세련된 전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최만린의 <태>시리즈

그 공간들을 채운 작가의 추상조각들은 집을 지을 때 함께 설계된 것처럼 멋진 조형미를 뽐내고 있다. 현재 <흰:원형> 전(2024.3.28~11.30)을 선보이는 중인데 최만린의 석고 원형 조각만 선보이는 최초의 전시라고 한다.  


1956년부터 2010년대까지 60여 년이 넘는 작가의 조각사를 아우르며 작가 작품의 '원형'들을 통해 '근원적 장소로의 회귀'라는 깊은 의미를 지닌 전시다. 본래의 석고 원형은 주물을 위한 형상의 틀로 간주되어 청동 주물 제작 직후 폐기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만린은 흙의 형태를 빌어 탄생한 석고 원형을 완벽한 형상으로 다듬어 조각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번 <흰:원형> 전을 통해 관람객들은 조각을 위한 틀과 조각 작품의 경계를 허문 석고 원형 조각들을 마주하며 작가의 예술세계를 엿보는 계기가 된 셈이다.


미니멀한 추상작품 속에 숨겨진 작품들의 이면에는 한국전쟁의 트라우마가 숨겨져 있다. 동아일보 만주 지국장인 부친과 모더니스트였던 어머니를 둔 작가는 서울 토박이로 종로 혜화동에서 윤택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경기중학교 재학 당시 한국 전쟁이 발발해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잃었다.

최만린의 <이브 >시리즈


물방울 작가로 알려진 김창열과 마찬가지로 최만린은 전쟁의 참상과 비극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조각을 시작했다. 이는 <이브>, <태> 시리즈로 이어졌다. 특히 <이브> 시리즈는 찢기고 부서진 정신적 물질적 폐허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명들을 지키고자 한 조각 한 조각 흙을 붙여나가는 작업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한국 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괴물이 미술사의 거목 이인성, 이중섭을 삼켜버린 대신 김창열과 최만린은  장수하게 놔둔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전시를 보고 나니 석고 원형들이 작가가 살던 집과 같은 운명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30년 동안 살던 이 작업실 겸 살림집에서 많은 예술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석고 원형과 마찬가지로 성북동 집도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 혹은 '틀'을 넘어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작가와 건축가의 손길과 노동 그리고 애정을 통해 집과 작품이 일종의 '존재론적 닮기'의 과정을 거쳐 혼연일체가 된 것 같다.  


목조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가면 작가의 자료실과 유품을 모아 놓은 공간이 펼쳐진다. 작고 직전 기록한 영상 인터뷰를 통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덤덤하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전하는 최만린 화백의 모습은 미술관과 많이 닮았 있었다.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을 지닌 화이불치란 말이 잘 어울리는 시쳇말로 '꾸안꾸'를 연상시키는  공간과 작품들은 작가의 심성과도 일치한단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 부인에게 꾹꾹 눌러써 보낸 엽서도 전시되었는데 사려 깊고 정감 있는 인물이란 걸 증명한다.


집도 훌륭하지만 작가의 작품을 오마주 했다는 "최만린 오마주 정원"도 볼만하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정원작가 권영랑이 2021년 제한된 공간을 최대한 다채롭게 꾸며 관람객의 발길을 오래 붙든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색다른 공간이 펼쳐지면서 작가의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오마주 정원은 크게 다섯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작가와 함께 원래부터 살았던 소철과 감나무를 통해 작가를 추억하는 '기억의 뜰', 조각 작품 <태>와 <맥> 사이 풀꽃을 형상화 한 '바람의 뜰',  '바위동산', 작은 연못처럼 조성된 '강가의 회상' 그리고 '조각가의 산책', '탄생의 대지'등으로 각 구역마다 틈새마다 이름을 붙였다.

처음 미술관에 들어설 땐 '금방 보고 나가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구석구석 작가와 건축가의 손길과 영혼느껴져 오래 머물게 된다. 작가의 심성을 닮은, 고즈넉한 가을 햇살을 머금은 늦가을에 찾아온 걸 행운으로 여기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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