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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Oct 21. 2024

서울시립미술관-미술관, 근대를 엿보다

미술관이 된 옛 건물 2


서울 도심에 살면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정동이다. 정동을 자주 드나들 게 된 계기는 2004년 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 덕분이었다. 시청역에 내려 넉넉하게 10분 정도 걸으면 닿는 서울시립미술관은 아마 서울에서 가장 접근성 좋은 미술관일 것이다.

 시청이나 태평로 일대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도 점심 때 잠깐 들러 돌아보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에서 정동길로 이어지는 길은 예전부터 고즈넉한 산책길로 사랑받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이 생긴 이후로 문화가 있는 ‘고품격 산책길’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한 때 이 일대가 사람들이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던, 누군가를 인생의 막장으로 내 몰았던 그런 극단의 장소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이었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법원과 그 부속건물들이 들어섰던 원조 법조타운이었던 곳. 그렇게 기가 센 터에 미술관이 들어섰다. 그것도 대법원 건물에.

정동에서 제법 높은 언덕 위에 위치했지만 잘 조성된 작은 숲길에 가려져 정동길에서 잘 눈에 띠지 않는 서소문동 37번지 서울시립미술관. 70여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이 건물은 앞모습부터 예사롭지 않다. 파사드 가운데 입구부분과 정면의 세 개 연속으로 이어진 아치형 포치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이루어져 이 건물의 유구한 시간을 증명하는 인장이나 다름없다. 반면 좌우 대칭으로 펼쳐진 네모반듯한 건물은 전형적인 현대 건축의 모습을 띤다. 사실상 건물 규모는 그렇게 크진 않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언덕 위에 지어져 주변 환경과 분리되어 보이고 과거 법원이었다는 중압감 때문에 완공 당시 심리적인 크기는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흔히 근대건물 하면 벽돌을 떠올리는데 이곳은 붉은 벽돌 대신 갈색 벽돌타일로 마감한 모던하고 매끈한 모습이다. 4개의 연속 아치로 마감되어 상당히 공들인 듯한 3층 창틀관 달리 나머지 창문들은 장식 없는 네모반듯한 형태다. 그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건축양식이 공존 혹은 충돌하는 모습이다.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라 불린 경성지방법원이었다. 법원이 지어지기 한참 전인 188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이 이 일대에 들어선 적이 있다. 이후 189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이 들어섰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토지조사국이 들어서기도 하는 등 여러 근대 기관들이 거쳐 갔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원래 종로에 위치했던 경성재판소가 낡고 업무도 늘어나자 일제는 소위 “불령선인”들을 단죄하기 위한 재판소를 새로 짓기로 했다. 기왕이면 어디서나 잘 보일 수 있는 높은 곳에 최대한 압도적이고 권위적으로.


조선인 최초의 건축가로 알려진 박길룡이 설계했고 당시로선 최첨단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 골체에 벽돌을 쌓고 외벽에 타일을 붙인 모던한 3층 건물이 지어졌다. 권위와 장식적인 요소를 한방에 다 갖추고 싶었는지 대리석으로 만든 돌출된 포치는 로마네스크풍의 연속 아치로 꾸며 두 가지 양식이 혼합된 경성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최신식 건물의 위용에 걸맞게 사법제도 역시 근대적인 시스템을 도입했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법 시스템은 당시 국제적인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후진적이었다. 총독부가 장악하고 있는 사법제도 속에서 검사나 판사들이 공정한 재판을 할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이들의 숫자도 극히 적었고 웬만한 권력은 경찰이 쥐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순사들은 체포한 사람을 가두고 합법적으로 고문하고 직접 재판까지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판검사보다도 순사가 더 두렵고 미운 존재였을 것이다. 미술관 벽돌, 대리석 하나하나에 식민지 백성의 한(恨)이 켜켜이 서려있는 것 같다.


광복 후 경성지방법원은 대한민국 대법원청사로 환골탈태 했다. 이 무렵 옥상에 한 층을 더 올려 4층으로 증축했다. 1950~60년대에는 점차 늘어나는 업무로 인해 별관 2채를 다시 짓고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법원도서관까지 지어졌다. 하지만 1995년 10월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한동안 비어 있다가 2004년 지하 2층과 지상 3층 규모의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이듬해에는 건축에 담긴 역사성과 조형성의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제(제237호)로 등재되었다.

건물의 파사드가 과거를 이야기 하고 있다면 파사드 너머 미술관 내부는 과거를 재현하는 어떠한 단서도 지워진 채 새로운 시간대로 전이된다. 파사드의 수평적인 시선과 대비되게 건물 내부는 우리의 시선을 수직으로 열리게 한다. 일단 중앙홀로 들어서면 2,3층 까지 이어지는 계단과 천장이 한 눈에 올려다 보이는 탁 트인 내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다소 칙칙하고 차가와 보이는 겉모습에 비해 유리로 마감한 지붕과 왼쪽 복도 벽면에서 자연채광이 쏟아져 들어와 공간이 더욱 넓고 시원해 보인다.


원래 법원 용도로 사용했던 걸 미술관으로 바꾸려니 내부는 과감하게 리모델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때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광복이후부터 1995년까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 판결이 이곳에서 이루어 졌단 사실을 감안할 때 아쉬움이 고개를 든다. 건물이 지닌 역사성을 보존하기 위해 한켠에 대법원 시대의 자료를 전시하는 상설관이라도 마련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기획전시가 열린다. 초창기에는 살바도르 달리, 샤갈, 르네 마그리뜨 같은 미술사의 대가들 기획전을 많이 열렸고 현재까지 데이비드 호크니, 이불, 권진규,  구본창, 노먼 포스터 등 회화에서부터 설치미술, 사진, 건축까지 대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매년 미디어아트를 집중 조명하는 <서울 국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가 열리고 2년마다 능력 있는 젊은 작가들을 선정해 지원하는 <SeMA전>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놓치면 안되는 행사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왼편으로 진입하면 미술관의 유일한 상설전시관인 천경자 화백의 전시실과 ‘가나아트 컬렉션’실이 있다. 화려한 색채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표출해 독창적 화풍을 개척한 천화백은 작품 속에서 항상 꽃과 여인을 등장시켰다. 그 중 작가를 '화단의 스타'로 등극시킨 1952년작 <생태>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35마리의 뱀이 엉켜있는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화백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완성한 그림이자 가장 아끼는 작품이었다.

1950년대에 한차례 개인적 시련을 겪은 화백은 <생태>같은 걸작을 낳았지만 말년에 겪은 <미인도> 위작 논란은 절필을 선언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나 보다. 그는 1998년 작품 93점(1940~1990년대에 걸쳐 제작)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외부와의 접촉이 끊어졌고, 2015년 8월 뉴욕에서 사망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끊겨버린 작가의 경력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이렇게라도 한 장소에서 작가의 다사다난한 일생과 대표작들을 훑어 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천경자실 옆에는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의 기증품으로 이루어진 ‘가나아트 컬렉션 앤솔로지’실이 있다. 그는 2001년 민중미술 작품 200여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는데 2015년에 이르러서야 상설전시실이 마련되었다. 오윤, 강요배, 김학철, 박불똥, 김인숙 등 1980년대 시대 상황을 화폭에 담은 민중미술작가 46인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한 때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옛 대법원 건물에서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불과 이 십 여년의 시차를 두고 너무도 다른 성격으로 변한 공간 그리고 옛 건물의 용도와 작품이 주는 묘한 충돌감이 느껴진다. 건물 용도의 변천사와 역사적 맥락 역시 개념 미술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작품을 둘러보고 3층 창가에 서서 잠시 미술관 바깥쪽을 주시할 것을 권한다. 창 너머로 덕수궁의 석조전과 중화문이 살짝 엿보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어진 근대건축물 내부에서 길 건너편 조선시대 고건축물과 대한제국 시절의 서양건물을 바라보는, 3가지 층위의 시간대를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미술관 밖에서도 전시는 이어진다. 미술관 마당에는 이우환의 돌과 철판으로 이루어진 설치미술 <항-대화>를 만날 수 있고 숲에서는 키네틱 아트로 유명한 최우람의 <숲의 수호자>, 키치아트의 대가 최정화의 <장미빛 인생> 등을 만날 수 있다,

한 때 근처에 대법원청사와 가정법원(지금은 서울시청 서소문 청사로 쓰이고 있다.)이 있었다는 이유로 덕수궁 돌담길에는 “이곳을 걷는 연인들은 헤어진다.”는 도시괴담이 떠돌았었다. 이제 과거의 버거웠던 시대적 임무를 훌훌 털어낸 서울시립미술관 일대는 늘 남녀노소 나들이객으로 북적이는  정겨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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