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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Oct 20. 2024

문화역서울284-장엄한 식민지의 유산

미술관이 된 옛 건물 1


<암살>, <밀정>, <경성크리처> 등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한국 영화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간이 있다. 연해주나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중대 임무를 띠고 경성에 잠입할 때, 경성역 플랫폼에 발을 딛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장하게 잡힌다. 아마 현존하는 근대 건물 중 시대극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 중 하나는 옛 서울역인 문화역서울284가 아닐까?

구 서울역의 역사는 19세기말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2년, 조선은 미국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서구 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서울 정동에 외교타운이 조성되고 조선에 신문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1887년 2월에는 경복궁 후원인 향원정에 최초의 전깃불이 켜졌고, 1898년 1월에는 청량리, 동대문, 종로, 서대문, 적십자 병원까지 전차 노선이 개설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이던 1900년 7월에는 한강철교가 개통되어 인천에서 노량진까지만 운행하던 기차가 서대문역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경인선 철도가 서울 도심 한복판까지 들어온 셈이다.


철도가 부설되면 자연스레 역사(驛舍)가 지어졌다. 1925년 이전까지만 해도 경인철도의 서울 종점은 서대문역이었다. 1900년 숭례문 근처에 새 건물을 짓고 이를 남대문정거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까 서울역의 최초의 이름은 ‘남대문정거장’인 셈이다. 초창기 남대문정거장은 시골 간이역처럼 허름한 목조 건물이었다.

일본은 일제강점기가 본격화된 1922년부터 르네상스 양식의 새 역사로 바꾸는 공사를 시작했다. 1923년에는 역명을 '경성역'으로 바꾸고, 1925년 9월 새 경성역사가 준공되었다. 사실 경성역은 일제가 동아시아 대륙에 진출하기 위한 도약대였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도 그랬듯, 한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중간 기지로 사용해 중국 본토까지 침략할 속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약탈한 물자들을 본국으로 빠르게 운반하기 위해서는 경성역이 필요했다.


이후 광복을 맞으면서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 사용되었다. 20세기 초반 기껏 시속 40㎞ 정도였던 기차의 속도가 21세기 들어 시속 300㎞를 주파하는 케이티엑스(KTX) 시대로 접어들어 서울역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했다.

2004년 KTX서울역 신역사가 생기면서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는 오래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시, 공연, 기획 행사를 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장한 이후 ‘문화역서울284’로 재탄생했다. 이곳에 다양한 미술가들의 전시가 거쳐갔다. 키치아트를 전면에 내세운 설치미술가 최정화, 한국적 미감을 선보인 <화첩기행>의 화가 김병종은 물론 헤더윅 스튜디오 같은 건축, 공예,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한 전시를 선 보이고 있다.

그래도 옛 서울역은 여전히 견고해 보이고 근처 높은 빌딩에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위풍당당해 보인다. 푸른 원형 돔 지붕과 화려한 절충형 비잔틴 양식, 붉은 벽돌 타일과 조화를 이루는 백색 화강석 수평 띠는 지금 봐도 참 아름답다. 스위스 루체른 역사를 모델로 하여 경성역을 설계한 사람은 도쿄역과 경성 한국은행 본점을 설계한 일본 건축계의 거물 다쓰노 긴고의 제자 쓰카모토 야스시로 알려져 있다. 1925년 준공 이래 2003년 말까지 철도역 기능을 마감하고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문화역서울284’의 '284'는 사적 284호로 지정된 것을 의미한다.

도쿄에 가면 문화역서울284와 쌍둥이처럼 생긴 도쿄역이 있다.  경성역은 도쿄역의 4분의 1 규모로 ‘작은 도쿄역’이란 별칭이 붙기도 했다. 원래 도쿄역만큼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했는데 1923년 도쿄 대지진으로 예산이 원래의 절반으로 삭감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규모나 외관만으로도 당시 유럽에 가볼 기회가 전혀 없던 서울 시민들에겐 엄청난 볼거리였을 것 같다. 조선총독부 건물보다 1년 먼저 준공되었으니 당시엔 장안의 화제였을 것이다.


역 안으로 들어서면 12개의 석재 기둥과 돔으로 구성된 중앙홀이 관람객을 맞아준다. 화강암과 석재로 구성된 내부는 유럽 대성당 내부로 들어온 것처럼 숙연한 느낌도 든다. 1층 홀 왼편에는 일등, 이등 대합실과 귀빈 대합실이 있었다. 왼편은 고위직과 상류층 전용이었고 오른쪽은 일반인들이 사용했다. 당시 귀빈대합실엔 대리석 벽난로와 거울, 고급 벽지는 물론 그 시절 첨단 난방 시설이던 라디에이터까지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이 '귀빈 대합실'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이용했다.

이발소와 화장실로 사용되던 공간은 현재 복원전시실로 탈바꿈했다. 복원하면서 나온 옛 건물의 부자재와 장식품과 함께 역사적 사료들을 둘러볼 수 있는 상설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구 서울역사 플랫폼이었던 자리에는 롯데마트 건물이 들어앉았다.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뒤로하고 문화역서울284는 공예품부터 첨단 미디어아트까지 일 년 내내 다양한 전시를 선 보이며 MZ세대에게도 각광받는 도심의 명소가 되었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경성역은 신문물의 도입 지였다. 기차를 통해 가깝게는 중국, 멀리는 유럽 대륙에서 진귀한 물자들이 도착했다.  철도 이용객들은 물론 경성 시민들은 경성역에서 시각적, 미각적 신세계를 경험했다. 우선 옛 서울역사 2층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당이었던 '그릴'이 있었다. 당시 일본인 관료들과 대부분 친일파였을법한 부유한 조선인들은 이곳에서 맥주와 돈가스, 심지어 프랑스식 달팽이 요리까지 즐겼다고 전해진다. 당시 쌀 한 말에 70전이었는데, 이곳의 양식 A코스는 3원 20 전이나 했다고 한다. 봄, 가을이면 월미도와 온양 온천, 부산 등지로 향하는 일본인 행락객들이 역사를 메웠다.

물론 기차를 탔던 사람들 중엔 이렇게 팔자 좋은 사람들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3등 칸에는 일제에 의해 토지를 뺏기고 서간도로, 일본 탄광으로 노동력을 팔러 다니는 노동자의 고단한 몸뚱이도 섞여 있었다.


 현진건의 <고향, 그의 얼굴>에서 화자인 주인공은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초라한 행색의 남자를 만난다. 그는 동양척식회사에서 토지를 뺏겨 오랫동안 객지를 떠돌다 마침내 고향을 방문하고 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고향과 이웃은 사라져 버렸고 자신이 목격한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 여호 살던 동리가 십년이 못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그는 서울역에 내린 후 “노동 숙박소”라는 곳을 기웃거리며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아무런 접점이 없던 화자와 남자가 만나는 공간이 기차 안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일제가 건설한 경부선은 자원과 산물을 수탈하는 것도 모자라 농민도 날품팔이 노동자 신세로 만들었다. 서울행 기차 안은 식민지 시대의 침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내년이면 이 건물도 100살이 된다. 남대문정거장에서 시작해 경성역, 서울역을 거치며 현재 문화역서울284라는 전시공간으로 자리 잡은 옛 서울역. 탄생 100주년엔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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