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아닌 둘 키우기
둘째가 여름 방학을 맞으며 꼭 하고 싶어 한 것이 있었다. 바로 친구와의 슬립오버. 슬립오버란 말이 낯선 이 들도 있겠지만 영어 원서를 많이 읽는 요즘 아이들은 파자마 파티보다 슬립 오버란 말에 더 익숙한 듯하다. 여자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원서에는 어김없이 슬립오버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미국이나 영국은 아파트보단 주택에서 아이들을 키우니 이웃들이 친해지면 파티도 함께 하고 아이들끼리 서로 번갈아가며 잠자는 문화도 발달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거주 형태가 주로 아파트이고 층간 소음에 예민한 우리는 어린아이들의 슬립오버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방학맞이 간절히 바라며 두 손을 그러모아 크지도 않은 눈을 최대로 크게 뜨고 간절함을 담아내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방학하자마자 그 주에 친구 한 명과 조촐한 슬립오버를 했다. 둘의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잠자리 파티는 원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으로도 그저 흐뭇했다.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끼니도 외부 음식을 사주고 싶지 않아 그나마 자신 있는 식단으로 정성껏 차려줬더니 둘이 쌍 따봉을 날려주며 “최고!”라 해줬다.
아이 친구는 집에 가서도 친구네서 보낸 하룻밤을 흡사 황홀경으로 묘사한 듯했다. 아이 어머니는 연신 고마움을 표현하며 다음에는 꼭 자기네서 함께 자는 날을 마련하겠다 하셨다. 오고 가는 마음에 싹트는 이웃의 정을 마다할 이는 없으리. 기꺼이 그러자고 했는데 그 다음 날 바로 인근 펜션에 몇 주후로 예약을 했다며 그 여행을 둘째와 함께 가도 되냐고 하셨다. 수영장이 딸린 펜션이라 아이들이 잘 놀 것 같다며. 기대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웠지만 소식을 들은 아이는 당연히 두 발과 손을 동동거리며 좋아라 했고 그 뒤로 날마다 남은 날을 세며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아이는 이날을 위해 학교 방학 숙제를 하루도 빠짐없이 해치웠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남은 가족들에게 부럽겠지만 어쩔 수 없다는 의기양양함을 뒤태에 잔뜩 뽐내며 떠났다. 물론 아이의 공백은 컸지만, 남은 우리 셋은 그 고요함이 좋아서 서로들 좋은 티를 감추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수시로 여유로운 미소를 드러내며 호젓함을 누렸다. 눈 떠서 잠들때까지 입을 쉬이 놀리지 않고 뭔가를 말하며 아빠가 곁에 있으면 그 몸 어딘가를 아빠의 신체에 올려두려고 기를 쓰며 달려드는 아이였기에 남은 가족이 체감하는 고요함은 엄청났다. 아이 하나와 둘의 차이가 이토록 클 수 있다는 것을 또 그렇게 체험했다.
다음 날 아침, 남은 우리 셋은 좋아하는 잠봉 샌드위치와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파는 브런치 카페를 여유로이 방문했다. 읽을 책만 지니고 있다면 몇 시간이고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둘째가 오기로 한 시간은 오후 3시. 1박으로는 그리움보다는 아쉬움이 큰 시간이었다. 밀도 있게 각자의 여유를 누리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친구네 집 문이 열리자마자 “엄마 더 놀면 안 돼?”를
외치는 아이의 외침에 친구와 1박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을지 가늠됐다. 10분만 더 놀라고 말미를 주고 애쓴 친구 어머니께 고마움을 표했다.
“근데 희서가 밤에 잠이 안 온다고 조금 울었어요.”
“아, 잠잘 시간을 놓치면 가끔 그렇더라고요… 달래느라 애쓰셨죠? “
“금방 잠들긴 했는데… 신기했던 게 희서가 울면서 언니가 보고 싶다고 막 그러더라고요. 어찌나 언니를 찾던지, 저희는 아이 한 명만 키워서 그런지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
“하하하, 거기서도 엄마 아니고 언니를 찾았나 보네요…”
둘째는 뭔가 서럽거나 속상하면 엄마보다 언니를 먼저 찾는다. 누가 들으면 엄마가 계모거나 엄청 못된 줄 알 것이다. 뭐 상상은 자유니깐! 안타깝게도 그렇게 언니 바라기지만 막상 언니는 이제 초고속 사춘기 열차를 타고 저어 멀리 떠나려는 낌새를 자주 보인다.
큰아이의 사춘기보다 언니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둘째의 히스테리를 받아줄 것이 더 걱정이다. 언제까지 서러울 때 ‘언니’를 찾으며 울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그나저나 자기가 없는 동안 우리 셋이 몹시도 편안함을 누렸다는 것을 알면 배신감에 치를 떨겠지! 그래도 그토록 애정하는 언니가 중간에 한 마디 했던 것은 알려줘야겠다.
“엄마 희서가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귀엽긴 하지! 없으니 쫌 보고 싶네! “
음, 진짜 둘째는 내가 키운 게 아닌 것도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