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모호함이 섬세함으로 바뀌는 것
동네 친한 언니를 만났다.
아무 연고가 없는 신도시로 이사를 와서 처음 친해진 인연을 쭉 이어오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다. 언니와 거의 6년 동안 가족 간에도 왕왕 교류하면서 살림 형편은 어느 정도인지, 신랑 직업이 무엇인지, 그리고 키우고 있는 아이들 성향과 학업 성취 과정까지 어느 정도 오픈하며 늘 진솔한 태도로 마주한다. 그런데 언니를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돌아오면서 갑작스레 난 이 언니에 대해 과연 어느 만큼 알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대방은 나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를 반문했다.
돌이켜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니 우리는 늘 각자를 둘러싼 주변 얘기들을 하느라 급급했다. 몇 시간이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지만, 그 수다에 정작 '나'는 빠져 있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에 주로 초점이 잡혀있다.
아이들 교육 걱정, 주변 집값이 얼마나 올랐더라 하는 부러움 섞인 이야기들, 그리고 간간히 신랑들에 대한 푸념과 지탄의 말들, 각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서 듣게 된 이러저러한 잡다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아, 서로 최근에 구입한 신박한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들도 꼭 들어있다. 써보니 피부가 좋아진 화장품과 먹어보니 얇던 머리카락이 두꺼워졌다는 검은콩 환 이야기까지. 참 많은 정보들이 쉴 새 없이 핑퐁이 튀듯 오고 갔다.
그녀가 나를 아끼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계속 관계를 이어오고 있음에도 왜 뜬금없이 나는 과연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수다에 정작 '나'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오고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말을 해보라고 판을 깔아준다고 할지라도 막상 무슨 말을 시작해야 할지 어렵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명료하고 뚜렷한 문장으로 만들어서 상대방에게 전달할 재간이 없는 것 같다. 도무지 무엇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에게 말로 전달하고 싶은 내 안의 고민과 감정들이 없는 걸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루에서 수십 번씩 나는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나의 내부에 무너지고 있는 게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가족을 위해 애쓰는 성실하고 착한 신랑의 아내, 크게 속 썩이지 않는 두 딸의 엄마. 외적 조건이 짐짓 나란 존재를 정의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면 감정의 과잉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 못 하는 걸까. 아니면 상대방은 진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안 됐는데 나 혼자 급 진지모드로 얘기하는 게 민망해서 그런 것일까.
보통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우린 각자가 가진 소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집과 돈 그리고 시댁 친청, 아이들 이야기. 내 소유가 아니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실제로는 내 소유라 인식하고 그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관해 답답함과 실망감을 호소한다.
하지만 분명 내가 아닌 것들은 절대로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이 설사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진짜로 내가 고민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홀로 있을 때조차 자신에 관한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란 배 위에서 즐거움과 안락함을 주는 오락거리들을 파도 삼아 나를 내맡기곤 한다. 내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할 의지와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타인과의 대화에서 급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더더욱 낯설고 어색한 것이다.
황현산 작가는 <말과 시간의 깊이>에서 말한다.
인간은 제정신에 들어있는 내용을 말로 소통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말이 그 정신 내용을 다 소통시키는 것은 아니다. 말은 복수의 인간을 상정하지만 정신에는 한 개인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는 몫이 있다.
말로는 결코 표현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견딜 수 없는 기분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이 때때로 찾아오지만 그 정확한 이유를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우울과 절망의 감정에도 난 사람의 도리를, 아내의 도리를, 그리고 엄마의 도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밑도 끝도 없이 서글픔이 치밀지만 그것을 말로 내뱉어버리면 내 존재가 한없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쓰는 것으로 답지를 만들어본다. 무수한 번뇌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서 삶을 옥죄는 번민에 빠질 때마다 나는 그 실태래의 끝자락에서 실 하나만은 꽉 붙잡고 제대로 된 길을 찾아보려 한다. 분명 실 하나를 힘 있게 잡고 놓치지 않은 채 조금씩 꼬인 실을 풀다 보면 엉켜있는 것들이 결국에 풀릴 테니 말이다.
은유 작가는 <다가오는 말들>에서 글을 쓰는 이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쓰는 과정에서 모호함은 섬세함으로, 속상함은 담담함으로 바뀌었다. 물론 글쓰기로 정리한 생각들은 다른 삶의 국면에서 금세 헝클어지고 말았지만 그렇기에 거듭 써야 했다. 어차피 더러워질걸 알면서도 또 청소를 하듯이 말이다.
쓰는 것의 기쁨을 알아감이 좋다. 나 자신을 속이는 삶이 되고 싶지 않다. 타인과 말을 나누고 그 삶을 공유하는 기쁨도 크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며 대화하는 동안 얻는 위로 덕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로 꺼내면 모호하고 애매하고 가벼워지는 것들. 그 지점에 서서 글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 쓰기는 각자가 가야 할 길로 안내하는 답지가 돼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