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
순하디순했던 큰딸은 “나는 왜 살아야 해요?”란 바위 같은 질문으로 사춘기의 포문을 열었다.
한창 미운 네 살이라 불리던 그때도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늘 웃으며 “네!”를 입에 달고 살던 아이였다. 순한 심성과 영특한 인지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기관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만나는 선생님마다 아이가 남을 배려할뿐더러 배움의 능력도 뛰어나다는 칭찬을 늘 받았다. 선배 맘들이 험난한 사춘기의 지난한 과정을 겪을 때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내 딸은 그러지 않을 거란 묘한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김없이 내 아이에게도 사춘기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 놓여있었고, 아이는 그 길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이가 “나는 왜 살아야 해요? 란 심오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는 친구들과의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친구들 관계에 여러 문제들을 겪으면서 이 전에는 단순하게 넘어가고 고민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아이에게 우르르 쏟아진 것이다.
아이는 친구들 앞에서 자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성격도 안 좋은 것 같고, 얼굴도 예쁘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면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모습과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모습,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할 때의 자신의 모습이 다 다른 것 같아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본디 아이는 “진짜 '나'는 뭐예요?”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진짜 나’는 무엇일까는 나를 지독히도 힘들게 했던 난제이다. 딸의 고민이 무엇인지, 그 고민의 답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인생 선배로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점점 넓어지는 인간관계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모습이 일관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는 내가 외향적인 사람인 것 같다고 하고 또 누구는 내향인으로 보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웃기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또 누구는 심오하고 진지한 사람 같다고 했다. 스스로 어떤 모습을 '진짜 나'라고 해야 할지.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모습은 분명 있었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는 그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바보처럼 있다가 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실제의 내가 아닌 그저 만들어진 거짓 페르소나인 것일까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특히 성인이 되어 만난 인간관계는 더욱 쉽지 않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학부모’란 정체성을 새롭게 얻었다. 학부모라고 이전과 뭐 다를 것이 있을까 싶었다. 외관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만나게 되는 관계가 달라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생활의 전반적인 설명을 듣기 위해 아이가 입학 후에 열린 학부모 총회를 통해 엄마들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 순전히 아이들을 통해 만나게 된 모임에서 나는 내 이름이 아닌 '누구 엄마'로 존재했다. 나의 배경과 성격, 환경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그저 누구의 엄마로만 만나서 나누는 교제는 뭔가 어색하고 헐렁했다. 아이들 학교 문제, 친구 문제, 교육 문제, 부동산, 재테크 등 나눌 이야기는 끝도 없이 쏟아지고 수다는 이어졌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아득해지기만 했다. 분명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나’가 맞을진대 마치 제 삼자의 모습인 양 어색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내 안에 그토록 거센 욕망이 잠재되어 있었는지를 알았고, 그 사나운 욕심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을 지닌 것은 ‘진짜 나’가 아니라고 스스로 부인하고 싶었다.
진짜 나는 욕망도, 비교도, 집착도 하지 않는 우아하고 고상한 존재라고 스스로 우기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가면을 쓴 만들어 낸 거짓 자아에 불과한 것일까. 심리학적 용어인 ‘페르소나’는 이제 보통의 삶에서도 쉽게 쓰는 어휘가 됐다. 예능에서는 페르소나의 개념을 재미있게 적응해서 ‘본캐’ ‘부캐’로 나눠서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한다.
큰아이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고민했던 것은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캐릭터가 바뀌는 것에 혼란스러웠던 것이리라. 그래서 환경이 바뀌어 이전의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새로운 모습으로 새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도 했다. 그 또한 많은 사람이 ‘진짜 나’를 찾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환경이 바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내가 원하는 ‘진짜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일까. 그거야말로 내가 만들어 낸 거짓 가면은 아닐까.
자아 찾기에 대한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하던 때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새로운 접근으로 답을 찾게 해 줬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란 책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고백한다. 그 고민의 끝에 소설이 하나씩 발표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고민 끝에 실험적인 소설을 하나씩 썼다는 그의 글은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천재 작가라로 불린 만하다. 여하튼 천재인 그조차도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는 여정이 있었다고 하니 반가운 동지애가 생겼다.
그는 만약 참된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자신은 ‘거짓된 자아’ 즉 가면을 쓴 가짜인지를 되묻는다. 우리는 일부러 어떤 가면을 만들어서 사람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의 나와 중학교 때의 나, 그리고 성인이 된 나의 각각의 모습은 분명 다르다. 과거에 만난 친구들이 훗날의 나를 봤을 때 ‘와 너 진짜 변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중에서 ‘참된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현재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이라면 이 전의 나는 가짜로 거짓을 보여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일부러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지’라고 의도하면서 연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오히려 고민하는 것 아니겠는가. 왜 그런 모습이 나에게서 나오는지 말이다.
그저 그 당시 만난 사람들과 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내 모습이 나온 것이다. 즉, 우리가 나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개인’은 사실 여러 모습으로 분화될 수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그 분화된 나의 하나를 ‘분인(分人)’이란 용어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분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나’로 합쳐진다. 그중에 어떤 한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라, 각각의 분인이 합쳐진 전체가 결국 나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의 분인으로 존재할 때의 나도 ‘참된 자아’의 하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분인의 모습이 표현되느냐는 누구를 만나고 그와 얼마큼 깊은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분인은 내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면서 결정된다고 한다면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내 모습에 대해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한 거지?’라고 하는 고민은 적어질 수 있다. 그와 어울리고 소통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관계의 고민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는 해답지를 찾은 듯 반가웠고 흥분됐다.
결국 지금의 나의 개성은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고유의 나인 것이다. 남편과 있을 때 나의 모습이 가장 편안하고 ‘진짜 나’답다고 느끼지만, 아이 친구들 엄마하고 있을 때의 나의 분인도 나의 정체성의 하나를 만들어 주는 한 부분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사회화를 하며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인간관계를 통해 나오는 각각의 나의 분인이 온전한 나를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면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나의 정체성을 만든 것이 나 홀로 분투하며 관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앞으로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정하게 만든다. 지금까지는 나의 의지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환경과 시스템-학교, 회사 등-에서 만난 관계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된 나는 온전히 나의 의지로 누구를 만나 어떤 관계를 형성할 것인지 정할 수 있다.
독서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혼란스러웠던 ‘자아 찾기’가 말끔하게 정리됐다. 글을 쓰고 있는 ‘나’만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됐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가장 뿌듯하고 좋다. 그렇다면 그 시간을 늘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관계를 확장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어떤 모임과 관계이든 내가 맺고 있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그들을 통해 온전한 내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낯선 내 모습조차 반가워진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이 애틋해졌고, 그들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면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깊이 일렁였다. 설사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이라도 과거 그 순간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그리움과 소중함이 크게 밀려왔다.
진짜 '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딸에게 책이야기를 해줬다. 아이가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쉽게 설명했고, 평소 생각이 깊은 아이였던지라 어느 정도 이해하는 듯 했다. 맑은 얼굴로 엄마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신기해했다. 나는 아이에게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네 모습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 모든 관계가, 모든 순간이 엮어져 가장 멋진 너로 완성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