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리 May 18. 2021

당신의 서랍 속

지금 열어보일 수 있나요?


어느 날 아이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가게 됐다. 넓은 평수에 굳이 안 해도 멋질 새 아파트에 인테리어 공사까지 완벽하게 끝내서 모든 곳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집이었다. 괜스레 주눅들게 하는 질투심은 공격하는 것을 물리칠 새도 없이 내 안에 머물러 앉아버렸다. 겨우겨우 나의 페르소나를 끄집어내어 안 그런 척, 우리 집도 이 정도의 격은 갖추고 있다는 양 도도하게 수다를 떨었다. 한참을 엄마들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던 차에 그 집 둘째 아이가 우리가 있는 주방으로 달려오더니 테이블 옆 서랍을 와락 열었다. 순간 호스트인 엄마가 당황하면서 "앗, 그 서랍을 왜 열어?!" 소리를 지르며 다급하게 서랍 문을 덜컥 닫아버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법. 아이가 순간적으로 열어버린 서랍 속을 우리가 모두 엿본 뒤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주 찰나의 순간에도 그 혼돈의 서랍 속이 왜 내 눈에는 사진을 찍듯이 적나라하게 박혀버렸는지. 완벽한 예술작품 속 그녀의 집에 숨겨진 그 비밀 공간을 몰래 엿봤다는 카타르시스를 관객들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집 안에 들어서면서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했던 질투심으로부터 해소되는 전율마저 느낀 순간이었다. 


당신의 서랍은 언제든 열어 보일 수 있나요? 


물론 나도 우리 집 서랍 속은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공간이다. 보이는 곳은 번듯하고 그럴싸하게, 요즘 트렌드를 좇아 미니멀리즘으로 최대한 보이지 않는 미학을 실천하느라고 우리 집 서랍도 주인의 욕망을 숨겨놓는 공간으로 버겁다. 처음에는 그 종류별로, 쓰임새별로 분명히 분류해서 차곡차곡 잘 정리된 상태로 넣어놨을 터인데 언제부턴가 서랍 속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을 던져 넣으면서 그 분류의 용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 친구네 집에서 돌아와서 우리 집 서랍들을 열어봤더니 누가 누구 서랍을 보며 희열까지 느꼈는지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뭐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라는 격이었다. 이참에 서랍 속 정리를 해보자 싶어서 서랍들을 모조리 다 끄집어냈다. 왜 그리 서랍 속은 정기적으로 청소하기가 싫은지. 


서랍 속은 과거 추억 속 부스러기들이 한가득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다시 넣어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게 한다. 신랑과 연애할 때 주고받던 편지부터 외국 여행을 갔을 때 환전한 후 기념으로 남겨두었던 동전들,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오래된 머리핀도 저 구석에서 발견된다. 여름에 모기 퇴치로 사용하고 남았던 모기약 한 뭉텅이들, 어디선가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남은 아로마 오일도 발견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계속 모아두기만 했던 가전제품 설명서들도 여기저기 흐드려져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설명서를 꺼내서 읽어본 적이 없거늘 왜 미련스럽게 쿨하게 버리지를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서랍을 열었을 때,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잔뜩 섞여서 한 뭉텅이의 쓰레기로 보이지만 하나하나 꺼내고 보니 모두가 아련하고 소중한 추억거리들이다. 그래서 차마 쉽게 버리지 못하고 언젠가 필요할 때가 있으려나 싶어서 서랍 속에 계속 쟁이고 모으다 보니 어느새 혼돈 속 서랍으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섞여 있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정작 필요할 때, 추억하고 싶은 그 순간에 그것들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또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면서 오래된 기억들 위에 덧입혀진다. 그 오래된 물건들은 서랍 속에서 그 주인이 존재도 모르는 구박덩어리들이 되고, 서랍은  차마 그 누구에게도 열어 보이고 싶지 않은 창피한 공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는 단호하게 서랍 속 물건들에 추억의 낭만 딱지를 떼 버리기로 했다. 그 딱지만 떼 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물건들이 된다. 물건으로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애틋한 추억들을 이제는 확실히 보관하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바로, 글쓰기의 서랍으로 옮겨두는 것이다.


내가 쓰는 이 브런치에도 <작가의 서랍>이라는 공간이 있다.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면서 이 공간을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삶 가운데 문득 얼핏 스치는 글감들을 재빠르게 포획해서 이 브런치 속 작가의 서랍에 보관해두는 것이다. 누가 지었는지 정말 기발하고 적절하게 이름을 잘 지은 것 같다. 작가의 서랍.


이 글쓰기의 서랍 속에 나의 추억 속 이야기들을 짧게나마 저장해놓았다. 한두 단어로, 혹은 몇 문장으로 말이다. 이 서랍 속에 보관해두면 분명 훗날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때가 올 것이다. 


물리적인 우리 집 서랍 어디라도 누가 열어봤을 때 낯부끄러운 곳은 없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속 서랍도, 내 글쓰기 세상 서랍 속도 그 쓰임새별로 아주 잘 분류되어 언제 어디든 필요할 때 꺼내서 쓸 수 있는 연금술의 작업 공간으로 바뀌어가길 바란다. 큰 욕심부리지 말고, 하루에 서랍 하나씩만 정리해보기로! 







사진 출처: Unsplash


이전 07화 월요 단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