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맛본 ‘오빠게티’에 반해버린 아내
요리 체험
by 책 쓰는 중고차 딜러 Sep 28. 2019
카셀에서 누린 소확행
오늘 이야기에 부제를 붙이자면 ‘카셀에서 누린 소확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부부는 카셀 시내에 있는 '스벅'에서 '아아'를 마시며 '카공족'이 되어 여유로운 낮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도 우리 부부는 좀처럼 카페에 가지 않았다. 둘 다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닌 데다 우리 둘밖에 없는 조용한 신혼집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기회비용을 따졌을 때 카페보단 영화관, PC방, 만화방 등을 선택하곤 했었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한창 일하고 있을 평일 낮 시간에, 한국 서울 촌놈이 독일 카셀 스벅에서 커피와 케이크의 향과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카페가 주는 나른한 풍미를 느끼며 여행 경비 지출 내역을 정리하고 다음 여행 계획에 대해 열심히 아이디어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덧 4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카페의 매력이 이런 것이구나!
한국에서도 좀처럼 카페에 가지 않던 우리 부부가 독일 스타벅스에서 보낸 4시간의 추억
우리 부부의 2인 3각 달리기
카페를 나온 우리 부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아시아 마켓을 향했다. 카셀 아름다운 교회 사모님께서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꼭 들리라고 알려주신 약도를 따라 더듬더듬 길을 찾아갔다. 아내는 길 눈이 정말 밝다. 한 번 간 길은 절대 잊지 않고, 처음 가는 길도 금방 잘 찾아가는 편이다.
반면에 나는 길치다. 이건 100% 유전이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도 지방까지 아무 문제없이 운전하며 다니던 아버지는 밤만 되면 더듬이 뽑힌 개미가 되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집 주변을 몇 번이나 빙빙 돌곤 했다. (그러다 한 번은 밤에 집 주변에서 경찰차를 들이받은 적도 있다. 실화다.)
우리 부부는 독일에서 1달 살기를 하면서 2인 3각 달리기에 임하는 선수들처럼 서로를 의지해 난관을 하나씩 극복해 갔다. 눈치껏 잘 알아듣는 아내가 귀, 눈치껏 단어로 말하는 내가 입이 되어 현지인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또 처음 가는 길을 찾을 땐 아내가 내비게이션, 나는 운전자가 되어 서로가 합력하여 목적지에 다다랐다.
아시아 마켓에서 만난 짜파게티
“오빠! 저기 있다! 저거 맞죠?” 숨어있는 해충을 기막히게 찾아내는 세스코처럼 아내는 이번에도 여지없이 목적지를 발견해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한중일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가지 식재료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한국에선 동네 마트에 갈 때 별 감흥이 없었는데 독일에서 ‘종가집 김치’, ‘너구리’, ‘고추장’ 등 한글로 된 식자재를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우리 부부는 신나는 발걸음으로 가게 안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우리 부부의 시선을 사로잡은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짜. 파. 게. 티! 해외여행 시 라면이 가장 당긴다고 하는데 이미 컵라면을 몇 차례 먹었던 터라 오히려 짜파게티가 우리 부부의 구미를 당겼다. 게다가 그 옆엔 물만 부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된장국도 있었다.
이 정도면 손쉽게 근사한 한식 요리를 할 수 있으리라 자신감이 붙은 나. 전날 아내를 배고프게 해서 혼쭐났던 것을 만회하고자 ‘오늘은 내가 요리사!’가 되기로 했다. “여보, 오늘은 내가 ‘오빠게티(오빠가 만든 짜파게티)’ 요리사! 내가 맛있게 저녁 만들어 줄게.” 나는 장바구니에 짜파게티, 김치, 간편 된장국, 두부, 김, 쌀을 담았다.
아시아 마켓 주소 : Martinsplatz, Hedwigstraße 9, 34117 Kassel / 영업 시간 : 오전 10시 ~ 오후 7:30, 주일은 휴무
에헴! 짜파게티로 말할 것 같으면
짜파게티는 ‘짜장면’과 ‘스파게티’의 합성어로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짜장라면이다. 지금도 ‘짜라짜라짜짜~ 짜~파게티’의 CM송과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의 카피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거 알면 아재 인증.)
고든 램지, 백종원 등 전 세계적으로 남자 셰프들이 대세다.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요즘엔 남자들이 요리를 못하면 대접받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주 5일이 아니었던 시절, 유일하게 일요일에만 쉴 수 있었던 남편이 ‘남자가 주방에 가면 XX이 떨어진다’는 가부장제 문화를 거슬러 요리를 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라고 외치며 가족을 위해 즐겁게 요리하는 남편의 모습을 담은 짜파게티 광고는 당시 전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간편한 요리로 가족의 한 끼를 책임질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짜파게티는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편)’의 새로운 지평을 열였다.
이 정도면 짜파게티는 단순한 인스턴트식품이 아니라 남녀평등을 향해 쏘아 올린 혁명적 신호탄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까지 오버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이유는 독일에서 먹은 짜파게티가 잊을 수 없는 맛의 추억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세기의 대결인 짜장과 짬뽕은 쉽게 결판을 내지 못해 ‘짬짜면’으로 잠정 합의를 보았고, 일반라면과 짜장라면은 양보할 수 없는 대결 끝에 ‘짜파구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날의 승자는 단연 짜파게티였다.
아내는 ‘오빠게티’를 먹으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역시 동공이 확장된 채로 그 어떤 산해진미 부럽지 않은 식사를 하였다.
일상의 소중함은 일상을 벗어날 때 느낄 수 있다
아내도 나와 같이 그릇의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가며 오빠게티를 흡입했다. 아내의 엄지척에 나는 멋진 요리사가 된 기분이었다. '오늘은 내가 요리사'가 아니라 '오늘도 내가 요리사'인 멋진 남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흔하게 먹을 수 있고 손쉽게 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 부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짜파게티를 끓여 먹은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상을 벗어나 낯선 땅에 오니 일상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집에서 짜파게티 한 접시는 굉장히 소소했지만, 독일에서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니 별 거 아닌 게 별 거가 되고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저렴하고 조촐한 저녁 식사였지만, 비싸고 화려한 음식 부럽지 않은 값진 한 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