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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리Rhee Nov 21. 2023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마흔이 되었다.


#번아웃 #불혹 #나로살기 #나는누구인가 #소명 #내가누군지도모른채마흔이되었다 #카를융


어린시절부터는 나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따랐다.  "여자도 스스로 경제권을 가져야해.", "글로벌 회사에 가서 진급도 하고, 전세계를 무대 삼아 성장하거라." 나는 이 말씀 두가지를 내 마음속에 신조삼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사회 생활을 하자니 너무 힘에 부쳤다. 회사를 관두고 육아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항상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야만 한다는 그런 신념속에서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리고 아버지의 권유로 입사한 직장을 제2의 학교로 삼아 아파도 끙끙 앓아가며 나의 사무실을 지켜냈다. 주중에 비웠던 아이들 곁을 주말이면, 거의 샴쌍둥이 수준이 되어 지켰다. 토요일, 일요일 여섯끼를 손으로 정성스레 차려낸다던가, 혹은 내향인인 내 성격을 바꾸어가면서까지도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 어울리며 나의 미안함을 속죄하고 싶었다.


그렇게 전투적인 삼십대를 마치고 마흔이 넘었다. 이번에,  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갑자기 내 손을 떠나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아이에게 만큼은 내가 온 우주였는데. 내가 깔깔 웃으면 같이 웃고,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면, 같이 울어주던 아이들은 점점 내 손을 떠나보내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자꾸 허전해졌다. 


작년에 이어, 나는 올해 두번 째 코로나에 걸리면서, 오랫만에 재택을 하게 되었다. 집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배우자는 대체 아빠라는 역할은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만큼 자신의 삶 자체에 충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나는 아픈 와중에 여전히 직장인, 애들 엄마, 친정부모에게 있어서 장녀라는 역할로 하루, 하루를 모두 메우고 있는 것이다. 삶 자체가 허무하고, 권태로워졌다. 외부에서 정의된 역할에만 갇혀서 움직이는 내 자신이 갑자기 어색해졌다. 이런 감정을 요즘 '번아웃'이라고 표현하던가?


친한  언니에게 이런 나의 상황을 토로했더니, 그 언니가 권해 준 책이 바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였다. 




지은이 제임스 홀리스는 '카를 융'의 철학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융의 철학관에 바탕을 두고 글을 풀어 내려간다. 마흔이 넘어 인생의 '중간항로'에 들어선 나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당신은 누구의 삶을 살았는가?" 친정아버지가 이야기했던, 사회인으로서 경제권을 취득했고. 친정어머니에게 부족하다 느꼈던 따뜻한 애정을 내 역량껏 아이들에게 쏟아오며 살아왔는데, 사회인/엄마/배우자/딸이라는 역할을 빼면, 너에게는 무엇이 남느냐고 물었다. 있는 그대로 느껴주지 않으면, 그렇게 네 안의 진정으로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너는 곧 타인에 대한 분노안에서 말라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잠정 인격이 만들어지다. -부모, 사회, 문화가 물려준 성격


내가 보는 현실은, 내게 씌워진 렌즈에 의해 굴절되어 보여진다. 우리는 유전, 성별, 가정환경 등에 영향을 받아 유년기 기억, '내면아이'라는게 형성이 된다. 곧, '잠정 인격'이란 내면아이가 받은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형성되는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를 인격보다는 성인되어 드러나는 성격, 자신이 처한 주변 환경에 대한  대응 방식(?)등으로 풀어서 설명하고 싶다.  따라서 마흔이 되어 나타나는 스트레스 증상(번아웃등)은 후천적 성격 아래에 숨어있던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간항로(The Middle Passage)'라고 책의 전반에서 설명되고 있는, 이 여정은 바로 후천적으로 '내면아이'가 만들어낸 것과 진정한 '자기'의 욕구 사이에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한 인간은 낡은 자신을 죽여야만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중간항로에 들어서다-의미 있는 삶으로 가는 여정의 시


중간항로는 '지금까지의 내 삶과 역할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누군가의 배우자, 부모, 가장 같은 제도화된 역할에 길들여져왔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역할들에 투사해버리기 쉽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라는 역할을 통해 자식을 통해  '투사'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고,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기대한다고 한다. 나도 또한 내 아이들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 왔으며, 내게 저지른 내 부모의 실수들을 나는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나 또한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관용적인 엄마(내가 친정엄마에게 못내 바라마지 않던)라는 모습으로 투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내가 베푸는(?) 사랑에 대해 감사해주고 영원히 내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내가 있었다.



결혼 생활도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내면아이'가 품고 있는 거대한 희망을 배우자는 이뤄주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럴 수도 없다. 나 또한,  맞벌이를 통해 나의 아버지가 스스로 짐지우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나눠지면, 남편은 내게 은혜(?)를 입고 감지덕지 나를 업고만 다닐 줄 알았다. 그렇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렇지 않았고, 나는 그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을 통해 '배신감'에 항상 부들부들 떨었다. 


부모 그리고 배우자의 역할에 투사된 나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기대하는 상대로부터 채워지지 않고, 나는 그렇게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온전한 인간이고 싶다 - 이제, 내면을 바라볼 시간


'인생의 중간항로에 들어선 당신에게 이제는 성장하여, 스스로 책임 질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삶은 무자비하다' 라고 하는게 내겐 너무나 큰 위안이었다. 코로나와 함께 온 헛헛한 나의 마음을 내스스로가 견딜수 없을 만큼 우울했기 때문이다.  결혼생활을 지속하려면 '내면아이'를 견뎌야만 하는데, 결국엔 '당신은 내가 결혼한 그 사람이 아니야'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배우자는 언제나 타인이었고, 내 스스로 바라마지 않는 애정어린 관계는 내가 내자신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에 결혼은 타인의 경험을 이해한 바탕으로, 상대의 존재 자체를 긍정해 줄 수 있는 상태에서 건강해 질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더욱이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타인의 요구에 맞추어 희생이 당연시되는 문화 색이 짙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남성보다도 더 적극적인 도전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순교자인 체하는 사람은 결국엔 좋은 어머니도, 좋은 배우자도 되지 못한다. 본받을 만한 여성으로 살았더라도 외부의 요구에만 순응한 대가를 자기 자신과 타인 모두가 치르게 될 것이다.'


부모의 역할에 있어서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 낼 때만이 자식의 삶을 질투하지 않을 것이며, 자식에 대한 기대 또는 한계를 투사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 자신의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성취해 낼 수록 자식 또한 자신의 삶을 마음껏 살아낼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한다. 나는 딸아이와 나를 동일시하고 나의 기대를 투사했다. 그렇게  딸아이가 스스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나의 한쪽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괴로워 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의 개성을 살리고 펼칠 수 있도록 내 스스로 먼저 내 자신이 되어야 겠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언제까지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항상 던지게 되는데, 결국엔 일로부터 얻는 돈과 권력 자체가 표상하는 '투사'를 나는 행하고 있음을 책은 말해준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나는 무엇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항상 겸손하게 귀 기울여야하며, 이는 곧 '소명'이라고 한다. 소명은 내가 택하는 것이 아니고 소명이 나를 택하는 것임을 또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 개성화, 융이 말하는 우리 시대의 신화


여태 힘들 때면, 나의 삶을 살아오며 '탓'을 참도 많이 해 온 나였다. 이렇게 힘들게 맞벌이 하는 것은 모두 친정아버지가 잘 못 물려준 신념 때문이라고, 친정엄마가 나를 따뜻하게 있는 그대로 포용하지 않아서였다고 말이다. 직장 외에 내게 아이들 밖에 없는 이 단순하고 의무감만으로 꽉 차 있는 나의 삶은, 남편이 나를 충분히 나의 기대치만큼 도와주지 않아서라고 탓을 하고 지내왔다. 직장에서 조금 더 잘 나가고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친정 부모님, 배우자, 더해서 시댁까지 모두 해당됐다. 그러나 이제보니, 나의 '내면아이'에 의해 모두 투사하고 그렇게 종속된 결과물이었다. 현재 나의 삶은 모두 나의 스스로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상처에서는 이제 그만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 껴안아야 한다. 과거의 상처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비슷한 성격과 말과 모습을 지녔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을 혐오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홀로 서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내 삶을 책임져줄 수 없다


마흔의 감정은 종종 지루함이나 우울함으로 막혀버리는데, 이를 유희로 이겨내야 한다. 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개성화에 대한 관심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고 타인의 개성화를 지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온전하고 충실하게 살아야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우리는 날마다 명상과 더불어 일기를 쓰는 등의 적극적인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잠정인격이 드러나는 나도, 그렇다고 내 안에 자리잡은 열등의식의 나도 모두 진정한 내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중간항로에서의 겪는 모든 부적절한 감정, 투사, 역할들과 당당히 맞서 싸운 뒤에, 거짓된 내가 죽고나면, 진정한 나와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진정으로 홀로서기를 이야기한다. 


우리 스스로 무한한 그 무엇인가와 연결이 되어있다면, 자신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한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연결되어있는 나 자신을 생각하며, 여여한 오늘 하루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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