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안내한 방은 생각보다 넓었다. 투 룸 빌라인 우리 집 방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었다. 문의 맞은편에는 나무 창틀로 된 창문이 있었고 창문의 우측으로 침대가 있었다. 방이 넓은 만큼 침대도 컸는데 무늬 없는 하얀 침구가 당장이라도 눕고 싶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샤워 가운도 개어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목재 선반이 있었고 그 위로 네모난 초록 뚜껑의 스탠드가 주황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밑에는 책 두 권이 겹쳐 있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얼마 전 샐린저의 일생을 다룬 <호밀밭의 반항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방에는 화장실도 있었고 샤워 시설도 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폭설을 주의하라는 재난방지 문자만 세 통 와있었다. 침대 위로 핸드폰을 던졌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긴 하루였다.
김집사는 나에게 푹 쉬라고 했다. 원하는 만큼 자라고 내일은 또 내일이 시작된다고 그러니 오늘은 편하게 쉬라고 했다. 침대에 누웠더니 몸이 노곤했다. 볼이 빨개졌고 열이 올랐다. 날씨도 추웠고 정신도 없었다. 피곤한 건 당연했다. 침대 위를 더듬어 아까 던져둔 휴대폰을 찾았다. 혹시나 했지만 신아영에게 연락 온 건 없었다. 핸드폰을 스탠드 아래 두고 눈을 감았는데 진동이 울렸다. 다시 핸드폰을 찾아 화면을 켰다. 네 번째 재난 방지 문자였다. 화면을 껐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잠에 들었다.
꿈에서 나는 겨울 숲 속에 있었다. 하얀 눈이 발에 밟히고 내쉬는 공기는 김이 되어 날았다. 차고 맑은 공기에 정신이 깨었다. 바람은 한 점도 없었지만 눈이 내렸다. 내리는 눈을 손으로 받았다. 하얀 몸통의 자작나무가 사방에 빼곡했고 그 사이로 길 하나가 나 있었다. 그 위에 내가 있었다. 고개를 들고 내리는 눈과 숲 속의 나무들을 바라봤다. 자작나무 숲이었다. 길의 저편에 빨간 점이 하나 보였다. 나무와 눈과 구름과 햇살 외에 딱 하나 보이는 빨간 점이었다. 다가갈수록 실루엣이 드러났다. 사람이었고 나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엄마였다. 엄마가 저 쪽에 있었다. 발걸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하기 싫다 거나 힘이 든다는 등의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다가갈수록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에만 중력이 쌔지 거나 땅에서 손이 나와 발 뒤꿈치를 잡는 듯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다리를 잡고 들어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걸 모르는지 엄마는 반가운 듯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불러 라도 보고 싶었지만 공기 빠지는 쉰 소리만 입에서 나왔다. 다리는 땅에 굳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팔만 휘저으며 엄마에게 외쳤다. 나 여기에 있다고 엄마는 괜찮냐고. 나 여기에 있다고 엄마는 괜찮냐고.
잠에서 깼을 때 신아영이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감기 환자를 돌보듯 내 볼과 이마에 손을 댔다. 내 얼굴이 뜨거운 건지 신아영의 손이 차가운 건지 헷갈렸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에 검정 끈나시를 입었는데 브래지어가 없었고 하의는 팬티만 입고 있었다. 그녀 뒤로 샤워가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은은한 스탠드 조명이 비쳤다. 목에서 쇄골, 어깨에서 팔로 이어지는 선이 아름다웠다. 시선이 자꾸 가슴 쪽으로 가서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고추는 이미 발기한 상태였다. 신아영은 내 눈을 보며 입을 다문 채 미소 지었다. 보조개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맑았고 아름다웠다. 그저 바라볼 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는 신아영을 사랑했다. 사랑이 아니면 표현할 방법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녀는 이불속에 손을 넣더니 내 고추를 만졌다. 나는 팬티를 입고 있지 않았고 입에선 작은 탄식이 나왔다. 신아영은 이불속으로 들어와 내 옆에 기대어 누웠다. 내 목에 얼굴을 묻고 왼손으로는 그곳을 만졌다. 터질듯한 발기였다. 그녀는 불편하다는 듯 이불을 걷고 내 목에 입을 맞췄다. 왼손을 움직이며 내가 입은 샤워 가운도 벗겼다. 공기가 시원했지만 더 이상 느낄 겨를은 없었다. 신아영은 점점 내려가 이내 그곳에 입을 맞췄다. 못 보던 장난감을 본 아이처럼 진지한 눈으로 내 페니스를 바라봤다. 입을 맞추기도 하고 입에 넣기도 하며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는 내 위로 올라와 팬티를 벗고 그녀 안에 나를 집어넣었다. 넣고 나서는 안도하듯 짧은 신음도 냈다. 콘돔을 안 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속은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벗지 않은 끈 나시 위로 젖꼭지 라인이 비쳤다.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사정했다. 몸을 잠깐 떨었다. 그녀는 내 위로 포개져 나를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참는 방법을 몰랐다. 첫 경험이었다.
창밖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 책 두 권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이제 보니 뭔가 제목이 잘 어울렸다. 앨리스와 파수꾼이 서로 친구일 것도 같았다. 1편, 2편으로 나뉜 시리즈 물의 제목 같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호밀밭의 파수꾼 이라니, 호밀밭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너랑 하고 싶었어. 아까 차에서부터."
신아영은 내 쪽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고양이 인간과의 만남도 엄마가 살아있다는 사실도 신아영과의 섹스도 많은 게 혼란스러웠다. 그런 상황에도 신아영과 맞닿은 살과 그녀의 체온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 나였다. 신아영에게 묻고 싶은 게 엄청 많았는데 뭐부터 물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와의 섹스가 좋았을까. 그것도 묻고도 싶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벌써 잠에 들은 것 같았고 나는 스탠드 불빛을 껐다. 이 또한 꿈일지도 몰랐다.
잠에서 깼을 때 방안은 밝았다. 창문으로 비쳐오는 햇살에 벽에는 창틀 모양으로 빛과 그림자가 경계 지어 있었다.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신아영은 침대에 없었다. 언제 일어나서 언제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샤워가운이 반듯하게 개어져 스탠드 앞에 놓여있었다. 밤에 있던 일이 혹시 꿈이었는지 한번 더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난밤의 여운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핸드폰을 보니 신아영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내 역할은 이곳까지 너를 데려오는 거였어. 만나서 반가웠어. 너희 엄마, 우리 부모님, 나 그리고 너도, 꼭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 섰다. 밤새 내린 눈에 세상은 온통 하얬다. 창틀에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비쳐 반짝였다. 피아노 건반이 튕기듯 눈 알갱이들이 빛났다. 창문을 여니 찬 바람이 들이쳤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는데 추워서 몸이 떨렸다. 다시 창문을 닫았다. 이 정도로 춥다는 건 내가 현실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내게 벌어진 모든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앞으로 마주할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현실의 인간이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배가 고팠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정신을 잘 붙잡아야 했다.
소파가 있는 로비로 갔을 때 김집사가 나를 맞았다. 소파에 앉으라고 했고 통밀 토스트와 블루베리 잼, 반숙 계란 프라이 두 개와 샐러드 한 접시를 식사로 내줬다. 샐러드에는 방울토마토가 올라가 있었고 갈린 치즈와 올리브 오일이 뿌려져 있었다. 나에게 커피를 마시냐고 물었고 아이스가 좋은 지 따뜻한 게 좋은 지도 물었다. 나는 따뜻하게 달라고 했다. 고양이 인간을 만날 수 있냐고 물었더니 당분간은 어렵다고 했고 신아영이 언제 나갔냐고 물었더니 여덟 시쯤에 이곳을 나갔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넘어 있었다. 낮에 보는 로비의 분위기는 밤과는 달랐다. 구운 빵 냄새와 커피 향이 고소했고 번질 듯 타오르던 장작은 하얀 재로 변해 있었다. 화로 안에도 햇살이 들었고 창밖으로는 눈꽃 핀 나무들 위로 하늘이 파랬다. 식사를 마칠 때쯤 사내는 나에게 집으로 갈 거냐고 물었다. 집 말고는 갈 곳이 없다고 했더니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미소 지었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과하지 않았고 존중받는 기분도 들었다. 사내의 차는 검정 포르셰 올드카였다. 40년 전 모델이라고 했고 성능은 좋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사내는 운전 실력도 군더더기 없었다. 고속도로에서는 180km 이상으로만 달렸고 과속 카메라를 지날 때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집이 어딘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도 나에게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신아영도 그랬고 고양이 인간도 그랬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니라 도서관이다. 신아영과 출발했던 그곳에 다시 온 것이다. 창 밖으로 도서관 전경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어머님이 사고 났던 곳으로 가세요. 그곳에 길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전부입니다'라고 했다. 과속은 절대 못할 것 같은 차분한 목소리였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엔진의 굉음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차도에서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눈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 이동이 많은 곳인데 관리가 안돼 있었다. 도서관이 휴관 중이니 그럴 수 있었다. 계단에 쌓인 눈 위로 동물 발자국이 몇 개 파여 있었다. 사람 손의 사분의 일 정도 되는 크기였다. 고양이 발자국이었다. 고양이 발자국 모양을 잘 몰랐지만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고양이 인간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건가. 아니 내가 그를 따라다니고 있는 건가. 그 발자국을 피해 계단을 밟았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고양이 발자국 옆에 내 발자국이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