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호 우리 집 우편함에 빨간 봉투가 꽂혀 있었다. 평소에는 광고 전단만 꽂혀 있던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우편함에 다가가 봉투를 꺼냈다. 빨간 가죽으로 된 서류 봉투였다. A4 용지도 들어갈 사이즈였고 봉투를 닫는 단추에 끈이 달려 있었다. 끈을 묵거나 풀어서 봉투를 여닫는 방식이었다. 봉투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302호 우편함이 맞는지 확인했지만 틀리지 않았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택배 회사에서 문자는 없었다. 전화 온 것도 없었다. 일단 봉투를 챙겨 집으로 올라갔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몸이 굳었다. 현관문 손잡이가 빠져 있었고 발 하나가 들어갈 만큼 문이 열려 있었다. 구멍에서 빠진 문고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현관을 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문을 열기엔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고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우선 몸의 움직임을 멈췄다. 조금만 움직여도 술래에게 잡힐 듯 모든 동작을 그만했다. 왼쪽 새끼손가락만 혼자 떨렸다. 평소에는 혼자만 안 펴졌는데 지금은 저 혼자 움직였다. 소리에 집중했다. 집 안에 누군가 있다면 인기척이 들릴 것이었다. 계단 쪽 창문으로 밖에서 애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건물 안쪽에서는 긴장 가득한 적막의 기운만 소리로 들릴 듯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누군가 소리를 숨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숨을 죽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관문의 옆면을 잡아 내 쪽으로 당겼다. 조심스러웠다. 소리가 나지 않아야 했다. 손끝의 감각에 신경을 모았고 다른 소리가 들릴까 청각에도 집중했다. 집 안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현관에는 집에 있는 모든 신발이 내팽개쳐 있었다. 여름 샌들, 슬리퍼, 여름 단화, 엄마의 구두, 등산화 등 모든 신발이 쏟아져 있었다. 방바닥에는 신발 자국이 가득했다. 눈 밟은 신발로 집에 들어온 듯 거뭇한 발자국이 사방에 찍혀 있었다. 그걸 보니 오히려 긴장이 풀렸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집을 망가트리고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집은 파괴되었다. 말 그대로 파괴였다. 세네 살 남자아이들이 집을 어지럽힌 수준이 아니었다. 눈 뭍은 신발로 누군가 집을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손에 집히는 대로 물건들을 집어던졌고 파괴했고 부서트렸고 망가트렸다. 소파는 직물이 찢겨 솜들이 삐쳐 나왔고 식탁은 다리가 부서져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찬장이 열린 채 모든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냉장고 문은 열러 있었고 안에 있던 음식들은 주방 여기저기에 던져져 있었다. 유리병에 담긴 딸기잼을 벽에 던졌는지 잼이 사방으로 튀어 있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김치가 바닥에 쏟아져 있고 그 위로 우유가 쏟아져 섞였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엄마 방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방 티브이는 화면 유리가 깨져 있었고 놀이공원에서 엄마랑 둘이 찍은 사진이 찢겨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장롱 속 옷과 요, 이불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엄마 짐이 바닥에 널 부러졌고 화장품도 깨진 채 서로 섞여 냄새가 독했다. 빨간 봉투가 손에 들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문 앞에서부터 그조차 잊고 있었다. 정체가 뭔지,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봉투를 열기 전에 먼저 내 방으로 갔고 상태는 마찬가지였다. 중고등학교 졸업앨범과 좋아해서 모아둔 책들도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엄마를 졸라 샀던 조립식 컴퓨터도 모니터부터 본체까지 박 나 있었다. 침대와 이불 위로 발자국들이 찍혀 있고 그 위로 창문 유리가 깨진 채 떨어져 있었다. 깨진 창문에서 찬바람이 들이쳤다. 이가 떨려 서로 부딪혔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귀를 때리는 듯 벨소리가 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더니 그냥 검정 화면이었다. 뭐지, 싶었지만 정신을 차렸다. 울리는 소리가 내 핸드폰 소리가 아니었다. 전화는 가까운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 누가 숨어있는지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인기척은 아무래도 없었다. 시선은 빨간 봉투로 향했다. 여기였다. 이 안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봉투 덮개를 열고 속을 살폈다. 빨간 아이폰이 있었다. 발신인 번호는 저장이 안돼 있었다.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았다.
“차민규 씨. 차민규 씨 맞죠?” 남자 목소리였다.
“네. 누구시죠?”
“아 저는 가이드입니다.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으세요. 급한데” 남자는 목소리 톤이 높았고 뒤로 갈수록 말이 빨라졌다.
“가이드가 뭔데요? 나를 어떻게 알고요? 당신도 고양이 인간과 일하는 사람이에요?” 덩달아 아돔 목소리가 급해졌다.
“아 그건 아닙니다. 할 말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요. 고양이 인간을 알긴 알죠. 아 가이드가 뭐냐고요? 그것도 할 말이 많은데 일단 그 집을 나오세요. 더 있으면 위험해요. 빨리 나와요. 전화는 끊지 말고”
“위험하다고요? 집을 이렇게 만든 게 혹시 당신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다 압니다. 다 알아요. 나는 당신 편이에요. 일단 침착하고, 내 말을 들어요. 일단 집에서 나와요. 시간이 없어요. 전화는 끊지 말고요. 빨리요. 지금 당장이요.” 그는 말이 더 빨라졌다.
하는 수 없이 집을 뛰쳐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서웠다. 뭐가 맞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1층으로 뛰어 내려와 빌라 현관을 빠져나왔다. 현관을 나오며 잠시 고개를 돌려 우편함을 바라봤는데 뭔가 이상해 몸을 상체만 문 안쪽으로 하고 다시 우편함을 바라봤다. 묘하게 뭔가 달라져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잠시 바라보다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편함에 302호가 없었다. 건물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있었고 빨간 봉투도 그곳에서 꺼냈는데 몇 번을 봐도 302라는 숫자가 없었다. 전화에서 다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차민규 씨. 차민규 씨”
핸드폰을 귀에 댔다.
“빠져나왔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이에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당신의 집은 사라졌습니다. 302호가 사라졌다고요. 이 세계에서 소멸됐습니다. 그곳에 있었다면 당신도 그렇게 될 뻔했어요. 다행입니다.”
"사라졌다고요?”
“완전히 사라졌어요. 이제는 없다고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이것도 현실의 세계, 소설의 세계, 그런 얘기입니까?”
“네 맞아요. 당신의 집은 지금,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무(無)’ 의 공간입니다. 현실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곳이죠. 없지만 있고 있지만 없다고 할까요. 당신 어머니가 흡수된 곳이죠.”
“당신도 제 엄마를 압니까?”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 어머니를 아는 게 아니라, 당신을 알고 있는 거예요. 당신을 도와주는 거고요.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은, 당신도, 균열 속에 빠졌을 겁니다. 그럼 모든 게 끝이에요. 다시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선택받은 자’를 기다려야 하고요”
“당신들이 말하는 '우리'는 누굽니까”
“균열을 막는 자들이죠. 균형을 잡는 자들이고요. 고양이 인간도 그중 하나입니다. 만난 적은 없지만요.”
통화를 하면서도 내 앞으로 사람이 두 명이나 지나갔고 얇게 펴진 하얀 구름 사이로 비행기 한대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자꾸 내가 잘못이라도 한 듯 말소리를 죽이고 시선을 피했다.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원래 알던 그대로 같은데 나는 자꾸 어딘가로 떠밀리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들은 나에게 엄마가 사고당한 곳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게 그들이 아는 전부라고요."
“정확해요. 거기로 가면 됩니다. 나는 그 근처예요. 지금 빨리 가세요. 빨리요. 혹시나 말하지만 절대로 집으로 다시 올라가면 안 됩니다. 당신도 빨려 들어갈 수 있어요. 절대 집으로는 올라가지 마세요.”
대답도 하기 전에 신호가 끊겼다. 그의 말이 맞다면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없었다. 1년 전에 엄마가 사라졌고 이제는 집도 없었다.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였다. 나아가야 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였다. 아니 이 현실의 주인공은 나였다. 그러니 뭐라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흥분됐다. 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