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 도심은 평화로웠다. 강남역 고층 빌딩 유리에는 겨울 햇빛이 반사돼 눈부셨다. 추운 날씨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중앙 차도의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했다가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어 대기하는 중이었다. 창밖으로 횡단보도가 보였고 보행신호로 바뀌자 사람들이 양쪽에서 쏟아졌다. 목도리와 털모자 등으로 몸을 감쌌지만 걸음걸이는 분주하고 바빴다. 사람들이 건너기 직전에 오토바이 한 대가 횡단보도 중앙에서 혼자 유턴을 했다. 유턴 지역이 아닌데 교통신호를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 같아 보기 안 좋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한 여자는 청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검정 부츠를 신고 기장이 짧은 검정 패딩을 입고 있었다. 패딩은 카라가 목까지 올라왔지만 기장은 엉덩이도 덮지 못해 안에 입은 흰색 스웨터가 보였다. 머리는 숏 컷이었는데 왼쪽 어깨에는 금색 버클이 달린 검정 핸드백을 걸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쳐 고개를 돌렸다. 횡단보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태우려고 버스 문이 다시 열렸는데 아까 그 여자도 버스에 탔다. 카드를 찍고 자리를 보더니 내 옆에 앉았다. 여자는 귀에 에어팟을 끼고 있었고 자리 앉고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았다. 빨간색 아이폰 미니였고 ‘전세사기’라는 자막이 보였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겨울이라 지하철 역 옆으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하철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공기가 바깥의 공기를 만나 생기는 연기였다. 세 정거장만 더 가면 엄마가 사고를 당한 정류장이었다. 엄마는 매일 아침 이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출근을 하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별 생각이 없었을까. 엄마가 사라진 뒤로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현실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엄마는 본인이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까(그게 맞을까). 정거장을 두 개 더 지났을 때 옆 자리 여자가 일어났다.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내릴 준비를 했다.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주변시로 그녀를 관찰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 그녀의 구두가 계단에서 또각 소리를 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정류장 맞은편 회사 건물이 있었다. 엄마가 청소부로 일하던 회사였다. 건물 실루엣은 그냥 직사각형이었지만 건물 테두리에 빨간색 철골 구조물이 1층에서 옥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유명한 건축가의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별로 멋은 없었다. 멀리서 봤을 땐 건물 테두리의 얇은 선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마포대교도 받칠만한 커다란 철근이었다. 내 앞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에는 차들이 지났고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에는 중년 여자가 남자 노인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8차선으로 차로가 넓어 왠지 불안해 보였다. 가이드가 준 빨간색 아이폰 벨소리가 울렸다. 아까 그 번호였다.
“도착하셨죠? 전화 기다렸는데 제가 먼저 했습니다” 역시 말이 빨랐다.
“도착했는데, 저는 뭘 해야 하죠? 어떻게 해야 하죠?”
“혹시 이상한 거 못 느끼셨나요?”
"어제 이후로 모든 게 이상해요.” 진심이었다.
“아뇨, 그런 거 말고, 거기 이상한 게 없냐고요” 자기 할 말만 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회사 건물은 거대했고 자동차들이 내 앞을 지났다. 버스가 오갔고 횡단보도를 사람들이 건넜다. 나는 전화를 하고 있고 날씨는 겨울이었다. 이상한 건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주변을 다시 살폈지만 역시나였다. 그때였다. 횡단보도가 초록불로 바뀌어 사람들이 건너는데 아까 본 중년 여자와 휠체어를 탄 노인이 같은 자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아까 분명 회사 쪽에서 반대편 공원 쪽으로 도로를 건넜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왜 다시 건너지, 아니, 언제 다시 반대편으로 갔지, 싶었다. 이상했다. 버스가 오는 쪽을 봤는데 내가 내린 파란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내린 지 오분도 안된 상태였다. 시계를 봤다. 세시 오 분이었다. 아까 내가 내릴 때도 세시 오분이었다. 횡단보도를 보니 휠체어를 미는 중년 여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움직이지 않았다. 소금빵 모양의 구름이 반쯤 해를 가리고 있었다. 버스 쪽을 보니 같은 번호의 파란 버스가 정류장으로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보았고 다시 하늘을 보았다. 똑같은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고 하기에는 계속 주변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계의 시침과 바늘은 같은 자리를 가리켰다.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차민규 씨. 이제 알겠어요? 그쪽은 시간이 어긋난 곳이에요.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이제는 놀랄 것도 없죠?"
"지금 어디예요? 언제 도착하는 거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요 아니요. 나는 거기 안 갑니다. 아니 못 갑니다. 가면 큰일 나요. 균열이 있는 곳 아닙니까. 나 같은 사람은 절대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
"여기로 만나기로 했잖아요."
"만나기로 하지는 않았죠. 당신이 가야 한다고만 했습니다."
"네?"
"중요한 건 당신이 거기에 갔다는 겁니다. 저를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는 아까 만났습니다."
머릿속을 빠르게 훑었다. 집이 망가진 걸 확인하고, 남자와 통화를 하고, 곧장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다. 그 사이 이 자를 만난 적은 없었다. 내내 혼자였다. 뭔가를 놓쳤는지 한번 더 생각했지만 짚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봐야 두 시간 사이의 일들이었다. 기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우리가 언제 만났죠? 나는 집에서 바로 여기로 왔습니다."
”아까 옆자리에도 앉지 않았습니까. 버스에서요 “
"네?"
“나를 힐끔거리기도 했잖아요. 내가 강남역에서 탔고. 쇼트커트 한 여자. 그게 접니다. 맞아요. 제가 목소리가 조금 특이합니다. 아니, 목소리 기준으로는 몸이 특이한 걸 수도 있죠. 아무튼 그게 접니다. 가이드 일을 하려면 오히려 유리하기도 하죠. “
인간 몸에 달린 고양이의 얼굴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놀라셨나요?”
“조금요" 황당했지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차민규 씨.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당신을 이곳에 데려오는 거요.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빨리 오라는 건 왜 그런 거죠? 나는 뭘 해야 하는 거예요? 그거 라도 알려주세요"
"아 그건 제가 바빠서입니다"
"네?"
"다음 스케줄이 있어요. 다른 선택받은 자를 도와주러 가야 합니다. 시간은 생명이죠."
"제가 여기에 빨리 왔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예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저는 제 일을 할 뿐이에요"
착한 사람 같기는 했지만 말은 잘 안 통했다.
“차민규 씨. 선택받은 자에게 필요한 건 자기 자신을 믿는 일입니다. 당신을 믿으세요. 당신이 가는 길에 답이 있어요. 많이 고민하되 단호하게 선택하세요. 그 길에 최선을 다하세요. 선택받은 자들을 수 없이 봤습니다. 모두 다른 길을 갑니다. 정답은 없어요. 아차, 시간이 없네요. 빨리 가봐야 합니다. 그럼 이만"
남자는, 아니 여자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나를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버스에서 내릴 때 구두로 계단을 밟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두 손을 비볐다. 짧은 통화에도 겨울이라 손이 시렸다. 시계는 아직도 세시 오분이었다. 나는 중년 여자와 휠체어를 탄 노인을 관찰했다. 똑같은 장면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 불에서 초록 불로 바뀌고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사원처럼 보이는 패딩 입은 남자 둘이 같이 건너기 시작했다. 한 명은 키가 작고 검정 롱패딩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카키색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손에 전자 담배를 들고 있었다. 걸음이 빨라 휠체어를 앞서 걸었다. 여자와 노인이 횡단보도를 중간 정도 건넜을 때 휠체어 바퀴가 갑자기 멈췄다. 바퀴가 도로에 끼인 것 같았다. 휠체어가 왼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여자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이리저리 힘을 주더니 바퀴 앞쪽으로 가 상체를 수그려 바퀴를 확인했다. 바퀴 살을 붙잡아 위로 당겼지만 휠체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급해 보였다. 노인은 멍한 눈으로 정면만 응시했다.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기 시작한 남자들은 벌써 절반을 넘게 건넜다. 신호등 보행신호의 시간이 줄었다. 내 시계는 멈춰 있는데 신호등의 숫자는 움직였다. 20초도 안 남았다. 횡단보도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버스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로는 왕복 8차선이었다. 아까 그 남자 둘 말고는 보행자가 없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뛰었다. 중년 여자가 나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쳤고 여자의 동공이 커지는 걸 느꼈다. 두려움과 놀람이 섞인 표정이었다. 여자는 입을 벌린 채 나에게서 내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나도 고개를 돌렸다. 트럭에 치였다. 벽돌을 담은 5톤 트럭이었다. 아이보리 색 트럭이었고 범퍼와 바퀴엔 흙이 묻어 있었다. 하늘의 햇빛이 반짝였다. 트럭에 담긴 벽돌이 도로에 쏟아졌다. 생각이 멎었다. 나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