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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11

by 추세경

따사로운 햇살이 땅 위에 내리고 볼을 간지럽히는 미풍이 피부에 닿았다. 풀잎들이 서로 부딪쳐 사르락 거렸고 벌레들이 몸으로 소리를 연주했다. 선선한 바람이 얼굴로, 겨드랑이로, 젖꼭지로, 사타구니로, 발가락 사이로 나를 건드렸다. 살아있는 감각이었다. 트럭의 범퍼가 나를 덮쳤다. 검정 범퍼에 흙이 말라 굳어 있었다. 트럭을 마주할 때의 잔상이 머리를 스쳤다. 아주 짧았고 다행히 고통은 기억나지 않았다. 순간 마음이 심장에서 배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그게 다였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니, 사후 세계인가. 과학자들은 육체가 분해돼 수소와 탄소 등이 된다고 했지만 영혼이 어떻게 될지는 실증할 수 없었다.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는 죽은 사람만 알 수 있지 않을까. 머리 한쪽이 아팠다. 춥기도 했다. 완전한 어둠 속이었는데 여름 햇빛을 직접 본 것처럼 눈이 따가운 것 같기도 했다. 눈알이 시린 느낌이었다. 그 순간, 눈을 떴다. 알람을 못들은 회사원처럼 눈이 뜨였다. 하지만 높게 뜬 해에 눈이 부셔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눈을 반만 뜬 채 손으로 햇빛을 막았다. 잠에서 깬 것 같았다. 혹시 그게 다 꿈이었을까, 신아영을 만난 순간부터 차에 치일 때 까지 겪었던 일들, 그게 전부 꿈이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나는 나체였다. 속옷 하나 입고 있지 않았다. 누워 있는 곳은 침대도 아니고 회사 앞 횡단보도도 아니었다. 바람이 피부를 건드리는 건 착각이 아니라 실제였다. 호밀 밭이었다. 호밀은 새싹처럼 푸르렀고 바람에 나부꼈다. 하늘은 대지를 감쌀 듯 파랬고 가슴 높이의 호밀이 사방으로 끝 없이 펼쳐졌다. 먼 곳에 산들의 능선이 보였지만 너무 멀어 비현실적이었다. 근육과 뼈가 분리된 듯 몸에 힘이 없었다. 이곳에 누워 얼마나 잤을까. 잤다는 표현이 맞을까. 일단 정신을 차려야 했다. 누운채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살을 느꼈다. 이곳이 사후 세계인 걸까. 그들이 말한 소설의 세계인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균열 속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살아 있었다. 아까는 죽었었지만 지금은 살아있었다. 몸이 그렇게 말했다. 가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나체였고 소지품도 없었다. 팔과 다리, 목뒤와 허리에 뭍은 모래와 흙먼지를 털어냈다. 맨몸으로 이렇게 햇빛 아래 서 있었던 적이 있었나, 기억이 안났다.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일년에 몇 번 없을 아름다운 날씨였다. 호밀 밭의 정경이 나의 세포들을 일깨웠다. 이정표나 건물 등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끝 없이 펼쳐진 호밀 밭 사이로 길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내가 있었다. 앞에도 뒤에도 양옆으로도 보이는 건 하나의 길과 고개 숙인 호밀들 뿐이었다. 황당했다. 잠에서 깼을 때 느꼈던 안도감과 평화로움은 이내 불안과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아무 가진 것도 없었고 누군가 나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상상 밖의 어떤 존재 든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호밀밭 어딘 가에 숨어 때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길이 있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을 간다고 어딘 가에 도착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사막 속에서 말라 죽는 사람처럼 걷다 지쳐 정신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한번 죽은 몸이니 다시 죽으면 영원히 소멸되는 건 아닐지, 이미 죽음 속(이 맞다면)을 살고 있지만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생생했다. 불안과 두려움 이상의 공포감에 피부 하나하나에 전율이 돋았다. 땅을 보니 내가 누워있던 모양이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물을 뿌린 듯 진한 색으로 사람 몸의 실루엣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머리와 목, 어깨, 손가락 사이사이, 허벅지와 종아리의 굴곡 등이 모두 표현된 형상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꽤 걸은 것 같은데 풍경은 똑같았다. 길은 직선으로 이어졌다. 맨발이라 따끔했던 발바닥도 이제는 걷는데 익숙했다. 직관적으로 해를 등지는 방향을 골라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거나 선택은 둘 중 하나였고 애초에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뒤인지에 대한 구분은 무의미 했다. 선택을 했고 일단 출발한 것이다. 해를 등지다 보니 그림자와 함께 걷는 기분도 들었다. 아까는 오줌을 싸기도 했다. 걷다 보니 공포감도 줄었다. 호밀밭 쪽으로 서서 쌀까 하다가 몸을 뒤로 돌려 걸어온 길 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가만히 서서가 아니라 뒤로 걸으면서 오줌을 쌌다. 바닥에 일자로 그림이 그려지는 게 재밌었다. 좌우로 흔들어 보기도 했고 그러다 손에 오줌이 묻었지만 옆에 있는 호밀 이파리에 닦았다.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신아영은 왜 나랑 잤을까. 그저 외로워서 그런 걸까. 차에서부터 자고 싶었던 건 왜 그랬을까. 지금은 어디로 간 걸까. 신아영과 섹스한 이후로 그 순간이 한 순간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팔 뒤쪽의 살 냄새와 귀에 닿던 숨소리, 혀와 혀가 닿는 감촉, 달빛에 반짝이던 머릿결, 봉긋하고 하얀 가슴 등 오감이 그때를 기억했다. 삽입할 때의 감각과 사정할 때의 기분이 아직도 페니스에 남아 있었다. 어느새 고추가 발기해 있었다. 걷기는 불편했지만 바람은 더 잘 느껴졌다.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고 있는 이 길로 달리고 싶었다. 뛰기 시작했다. 팔을 앞뒤로 젓고 발을 구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도 그날의 섹스를 생각했다. 페니스가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뛰는 탄력이 팔과 다리 고추에 전달되었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발목을 들고 뛰었다. 속도를 올렸고 바람 소리가 귀에 들렸다. 얼마만의 달리기일까, 전력으로 뛰었다. 지금 이대로, 이 탄력 그대로,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림자도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찼다. 더 빠르게 속도를 냈다. 있는 힘껏 팔과 다리를 저었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살아있을 때 보다도 더 살아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끝에 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길의 끝이 어딘지 가보고 싶었다. 바람에 호밀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달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가을 하늘이었다. 맑고 높은 파란 하늘이었다. 호흡이 가빴고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저 멀리 언덕이 하나 보였고, 그 위로 붉은 점이 하나 보였다. 사방에 호밀만 가득하던 지금까지 와는 풍경이 달랐다. 조금 더 가보니 점이 아니라 집이었다. 2층으로 된 주택이었다. 더 이상 걷기 힘들 정도였는데 걸음에 다시 힘이 붙었다. 드디어 뭔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꽤 멀었지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저 곳에 뭐가 있을지 모르고 나체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저기로 가야 했다. 호밀 밭 속의 길은 언덕까지 이어져 있었다. 결국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출발할 때 혹시 반대로 출발했어도 이 언덕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결국 도착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미 지금은 불가능한 세상 속을 살고 있었다. 불가능의 세상이란 불가능한 일이 언제든 가능한 세상이었다. 언덕은 제주도의 작은 오름 같았다. 집이 보이는 정상 까지 한달음에 가기엔 벅찼고 10분 정도는 올라야 했다. 길은 집까지 이어져 나를 이끌었고 길 옆으로는 어김없이 호밀이 가득했다. 언덕을 오르며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아름다운 광경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 끝 없이 펼쳐진 호밀 밭이 따스한 미풍에 너울졌다. 파도에 햇빛이 부서지 듯 고개를 숙인 호밀 하나하나에 햇살이 부딪혀 반짝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면 연주에 집중하는 교향악단 마냥 호밀들은 자연의 숨결을 연주했다.


집은 갈적색 벽돌로 지어진 집이었고 지붕은 빨간 기와가 중앙에서 양 옆으로 흘러내리는 삼각형 이었다. 정면에 현관이 하나 있었고 양 옆으로 같은 크기의 직사각형 창문이 보였다. 현관 위에는 원형 창이 있었다. 빨간 기와로 이루어진 지붕 삼각형의 한가운데, 그 중심에 자리한 창문이었다. 어디서 본 기억은 없었지만 어디서나 본 것 같은 집이었다. 집 바로 옆에는 집 높이 보다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지들이 사방으로 약동하듯 뻗어 있었다. 집을 둘러서는 합판으로 된 울타리가 허리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격자처럼 간격을 두고 세워져 바람이 통하고 시야가 트인 울타리였다. 언덕에서부터 이어진 길이 울타리 중앙의 대문으로 이어져 있고 대문 옆에는 새집 모양의 빨간 우편함이 달려 있었다. 하얀 글씨로 'post' 라고 적혀 있었지만 이런 곳에 편지가 올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대문은 열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누구도 마주친 적 없었지만 습관처럼 주변을 한번 살피고 손끝으로 대문을 천천히 밀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10m 남짓이었다. 집의 현관까지 디딤돌이 깔려 있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렸는데 방금 전에 물이라도 준 듯 싱싱했고 잡초 하나 없이 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대문에 들어선 후로는 당당하게 걷기가 어려웠다. 몸을 가릴 게 없는지 마당을 살폈고 현관 기준 왼쪽 뒤편에 작은 수돗가가 있었다. 수전 앞에 빨간 고무대야가 있어 뒷꿈치를 들고 잰걸음으로 달려가 고무대야를 집어 들었다. 그대로 하체를 가렸다. 구부정한 자세로 좌우를 살피며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문 옆으로 초인종이 있었지만 누르지 않았다. 울타리 대문이 열려 있던 게 생각나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이런 대범함이 어디서 나오는지 초등학교 때 다른 집 벨튀(벨을 누르고 튀다)는 해봤지만 중학교 이후로는 친구들에게도 별로 장난을 안치던 나였다. 지금 내 행동은 대범함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나왔다. 문고리를 부수고서 라도 이 집 안에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밀밭을 지나오며 마음을 느긋하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막상 이곳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니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야 할까. 어차피 모든 게 이상했다. 이 집에 누군가 있다면 그도 내 사정을 알거나 최소한 그만의 사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현실에서 처럼 남의 집에 침입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든 이 집에 들어가야 했다. 초인종을 눌렀고 현관문에 노크도 했다. 철제문이라 두드릴 때마다 쇠소리가 울렸다. 안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시간 간격을 두고 몇번이나 초인종도 누르고 노크도 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누구 없어요?' 하며 주먹으로도 두드렸다.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안에 누가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소리였다. 들고 있는 고무대야를 내려 놓고 창문쪽으로 갔다. 안에 누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본 커튼은 개방되어 있었지만 속 커튼이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흐릿하게 집 안쪽이 보였다. 일반 가정집 다를 거 없는 실내였지만 티비는 없었다. 잠시 들여다 봐도 사람이 집에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지금 집에 있든 없든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건 흐린 실루엣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햇빛을 가리듯 눈썹 위에 두 손을 대고 창문에 얼굴을 붙였다. 양쪽 커튼 사이에 작은 틈이 있어 그 사이로 안쪽 상황을 보려고 했다. 틈으로는 거실 쪽 테이블이 보였고 거실 너머의 주방이 보였다. 거실과 주방에 형광등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한쪽 눈을 감고 창문에 붙인 얼굴을 좌로 우로 움직여 가며 최대한 집 안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거실과 주방 일부가 보이는 것 말고는 더는 시야를 확보하기 힘들었다. 얼굴이 짜부러지도록 내부를 살폈지만 한계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옆으로 밀어보았다. 창문이 열렸다. 이중 창이라 속 창문도 있었다. 속 창문도 옆으로 밀렸다. 바람이 불어 창문 안쪽 속 커튼이 휘날렸다. 하는 수 없었다. 창문을 완전히 열고 창틀을 넘었다. 창틀로 올라가다 무릎 안쪽이 벽면에 긁혔다. 속 커튼을 가림막 삼아 집 안에 착지했다. 안도감이 희열처럼 밀려드는 순간,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돌려 금속 래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몸이 그대로 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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