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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Apr 24. 2019

착한 어린이 증후군

살아가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아버지가 타지에서 일을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내가 채워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낄 나이는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속은 썩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할 나이는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착한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다. 집안에서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동생 잘 챙기는 장남 역할을 했다. 집 밖에서는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타인의 입을 통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려면 타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고, 자연스레 감정의 민낯을 숨기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함께할 때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과하게 넘을 정도가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생기거나,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자리의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스스로 차단했다. 나 혼자만 참고 이해하면 다 좋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가끔 거짓을 말하기도 했다.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잘못으로 인해 헤어짐을 선택해도 좋은 사람이었다는 기억으로 남고 싶어 쓴소리 한번 없이 이별을 선택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미친놈이라고 이야기했다. 직장생활은 감정 감추기의 정점이었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당하면 웃지는 못해도 찡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겠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조직에 잘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은 책임감 있어 보였고 그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다.


부모님 속 썩이지 않는 착한 아들이 되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느새 착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어쩌면 이러한 행동은 나에게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비난과 조롱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이란 감정을 섣부르게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면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을 착한 아이 증후군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가면 증후군,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 등 감정과 관련된 다양한 증상이 현대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 상황이 더 악화하지 않고, 타인으로부터 괜한 오해를 받길 원하지 않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단지,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기에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증상이 심각해지면 화병,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질병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결국은 자신의 감정보다 남의 시선이 더 중요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살아가는 것은 ‘나’인데 왜 중요한 것은 ‘남’일까? 

 

웹툰 <죽음에 관하여> 中

  

이경규는 대한민국 최고의 개그맨이다. 대중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연예인 중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6년전 방송에서 털어놓은 공황장애는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 정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그였기에 사람들은 더욱 놀랐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다른 연예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드러났을 뿐이었다. 본래 자신의 모습은 대중의 시선 때문에 나타낼 수 없었다. 결국,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나 자신을 속인 채 살아가고 있었고 병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의 고백 이후 많은 연예인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방송에서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을 할 수 없었고, 슬픈 일이 있어도 웃어야 했다. 찡그려지는 표정마저도 다음 날 인터넷에는 메인 뉴스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와 내 주변에서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어떠한 형태로든 돈을 버는 사람은 상대에게 감정을 숨기거나 속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회는 특별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해서만 감정노동자라고 말하지만, 돈을 버는 사람 중에 감정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나와 우리의 모습


사람은 매일 내 안의 감정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가 ‘남’보다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남’을 신경 안 쓰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에 집중하여 감정을 꺼내야 한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건강때문이다. 쌓인 감정은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스트레스는 다시 만병이 될 수 있는 확률을 키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래도 상대가 신경 쓰인다면 3가지 방법 중의 하나만 선택해도 나을 것이다.    


첫 번째는 감정이 쌓이지 않게 바로 내뱉는 것이다.

보통 남미 사람의 성격이 열정적이며 자유롭다고 이야기한다. 남미는 가보지 못했지만, 몰타에서 머물 동안 남미 친구들과 어울리며 감정에 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었으며 주변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그런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쓴소리를 들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술에 취한 이탈리아 친구가 브라질 친구에게 “너희 남미 애들은 너무 이기적이야.”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흥겨운 파티 분위기를 시베리아 벌판처럼 급랭시켰다. 브라질 친구는 가지고 있던 잔의 남은 술을 들이켜고는 그에게 답했다.    


“우리는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 다만 이타적이길 바랄 뿐이지. 우리는 그저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뿐이야. 솔직함에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해. 그렇지만 감정을 숨기면서 친구를 대하고 싶지는 않아.”    


그의 말이 끝난 후 다시 정적이 흘렀지만, 이탈리아 친구가 “그래서 난 너희가 좋아.”라는 이상한(?) 말과 함께 다시 분위기는 유쾌해졌다. 이기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맞지만, 감정에 좀 더 솔직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상대를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 생각과 행동이 타인의 시선과 다른 어떤 것들에 비해 좀 더 중요할 뿐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제때 표현하면 묵은 감정이 잘 쌓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 짜증 내고 화를 내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분노조절장애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감정을 뱉는다는 것이 부정적인 기분을 밖으로 내뱉으라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잘 표현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다. 첫 번째 방법은 가장 효과적이지만, 다른 방법에 비해 상대의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진짜, 가짜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다.

모든 감정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고, 심심하면 놀고 싶다. 바지에 껌이 묻으면 짜증이 나고, 욕을 들으면 화가 난다. 단순하지만 자연스러운 진짜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언제까지 배가 부른데 배고프다 하고, 커피가 옷에 묻으면 웃으면서 괜찮다고 할 것인가? 가짜 감정을 계속 만들면 감정의 노예가 되며, 언젠가는 진짜 감정과의 경계선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뒤늦게 진짜 감정을 찾으려고 하면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우리가 자주쓰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가 제격이다. 


이마저도 쉽지 않다면 세 번째 방법인 감정으로 인해 발생한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방법은 첫 번째, 두 번째의 예방과는 다른 치료 방법에 가깝다. 독서, 운동, 대화, 쇼핑, 등 범법이 아닌 이상 어떠한 방법이든 상관없다.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 또한 감정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기 때문에 운동, 술, 대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임시방편에 가까울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자신은 스트레스를 잘 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하루는 회식이 끝나고 새벽 1시쯤 집 앞에 도착했다. 주량을 넘어선 상태였지만, 평소처럼 문 앞에서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치고 정신을 차렸다. 집에 들어와 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엄마에게 인사드리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숙취와 싸우고 있을 때 엄마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퇴근 후 집에서 전날 있었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알게 되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엄마 방으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 “너무 힘들다. 회사생활 못 하겠다.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말을 이어가며 30분 동안 하소연했다고 했다. 듣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보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렸다는 것이 매우 큰 충격이었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잘 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진짜 감정이 내면 깊숙이 쌓여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내 감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3가지 방법을 통해 얼굴 위에 씌워진 착한 가면을 벗으려고 노력 중이며, 묵은 감정을 하나씩 꺼내는 중이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노력 중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 모습이 아닌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뒤늦게나마 감정의 가치를 깨달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감정은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요소임을 여행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웹툰 <랜덤채팅의 그녀> 中





책 <답은 '나'였다>와는 달리 사진 몇 장을 첨가하였습니다.

(기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위클리 매거진 목차가 총 12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맥락을 이해해야 하다 보니 사진 몇 장을 넣는 것이 좀 더 공감하기 쉽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4월 27일 교보문고 창원점 북토크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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