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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Apr 03. 2019

바닥에 대한 고찰

나는 '내 안의 나'를 알고 있을까?

20대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하던 연애 이야기는 30대가 되면서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로 옮겨졌다. 기혼자가 함께하는 날이면 남녀 가릴 것 없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상대방의 바닥을 봐야 해. 대부분 성격이겠지. 연애와 결혼은 완전히 다른 거야.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야. 연애 때 상대의 바닥을 보고도 결혼할 마음이 있다면 무조건 해야 해. 아니라면 뭐, 각자 알아서 판단하는 것이고.”    


미혼자의 입장이지만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평생의 반려자로서 함께하는 사람이므로 신중한 선택이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혼한 친구들의 공통 된 이야기는 “내가 걔를 그렇게 몰랐을 줄이야.”로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를 생각하기 전에 ‘내바닥은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한다. 자신도 모르는데 남의 바닥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의미도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바닥이란 여러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심신의 한계에 다다를 때 쓰는 말이며, 대부분 예상치 못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는 자신의 주량을 넘어서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그건 그냥 술에 취했을 뿐이다. 보통은 바닥이라고 하면 사업이 망했거나, 천재지변으로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보았거나, 도박이나 투자로 모든 돈을 탕진했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심신으로 너무 힘들 때 바닥에 닿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중에서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바닥에 닿았다는 느낌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직장인의 3대 소지품이 핸드폰, 지갑, 사직서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소위 멘탈이 탈탈 털린다는 말이 바닥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쌓이고 쌓이면 바닥에 닿게 될 것이다. 한 지인은 이런 상황을 오랫동안 겪고 나서 “내가 내일 부장 죽이고 감옥 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진심인 듯한 그의 말이 행동이 되지 않도록 2시간 동안 통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누군가의 바닥을 보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겪는 것은 더욱 싫었다. 원하지도 않았고, 겪어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만약에 겪는다면 깊은 좌절감과 삶의 무의미함이 느껴질 것으로 생각했다. 혹시나 겪었을 때 남에게 그 모습을 보였다면 치부를 드러내는 잠깐의 부끄러움이 아닌 그 이상의 치료되지 않는 감정이 들 것으로 생각했다. 앞에서는 위로받지만, 뒤에서는 수군거리고 동정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은 점이 보이지 않는 바닥에 닿는 행위가 나에게 해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살면서 한 번은 닿는다는 바닥이 나를 지나쳐 갈 일은 없었다. 삶에서 평탄한 길만 있기를 원했지만, 현실에는 10cm 물웅덩이, 10m 구덩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까지 다양하게 존재했다. 보이는 장애물을 피하면서 걸어도 싱크홀처럼 예상치 못하게 툭 하고 떨어지는 경우도 존재했다.    


갑작스러움은 언제나 나에게 발생할 수 있다.


인도는 더럽고, 불편하고, 예상치 못한 환경을 겪는 상황이 많아서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끝이라고도 불린다. 여행자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는 이집트 다합에서는 ‘여행하기 힘든 곳은 아프리카인가, 인도인가’ 라는 주제로 2박 3일 동안 토론이 가능하다는 말도 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공항 노숙으로 인도에서의 첫날을 시작했다. 미얀마에 머물 때 선베드가 부서져 다쳤던 등 부위의 통증은 점점 커졌다. 목과 등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즐링에서의 몸살은 3년 이내에 겪었던 아픔 중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인도 여행자 10명 중 9명이 겪는다는 물갈이는 필수코스였다. 며칠이 아닌 머물렀던 한 달 내내였다는 점이 남들과 달랐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언제 가질지 모르는 추억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바라나시에서 자이푸르로 열차로 이동할 때 발생한 개인적인 문제는 나를 여행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이푸르에 도착하여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취하려고 술을 마셨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 귀찮았다. 인생에서 처음 발견한 내 바닥이었다. 더 힘들었던 것은 함께하는 일행들에게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때가 되니 남의 시선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던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다.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곳의 밑에는 또 다른 바닥이 있다는 것을.    


독일 수도인 베를린에 머물 때였다. 떠나기 이틀 전날 밤부터 몸이 좋지 않았고 열이 40도까지 올랐었다. 급하게 병원에 다녀왔고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몇 달 전 자이푸르로 가던 기차 안에서 발생했던 문제가 더 커져 버렸다. 전날의 열이 아직 떨어지지도 않았지만 술을 마셔야만 할 것 같아 근처 펍으로 이동했다. 술로써 무엇을 잊고, 지운다는 것은 해결도 안 되면서 다음 날 머리만 아픈 가장 멍청한 선택임을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소주 10병도 마실 것 같은 기세였지만 몸 상태로 인해 맥주 4잔에 취해버렸다. 자정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가게에서 나왔다.


밤 12시는 혼자 걷기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한 나라의 수도이자 금요일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내 인생은 왜 이런가?’ 하며 짜증을 하늘에 퍼붓는 도중에 무언가 내 등을 툭 하고 건드렸다. 공기가 서늘해졌고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었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여행자에게 심심치 않게 들었던 상황이었다. 다만 내가 얘기로 들었던 곳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 혹은 남미에서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후 손가락으로 호주머니를 가르쳤다. 그는 내가 수중에 가지고 있던 70유로를 원래 그의 돈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는 자기 일을 마무리했다는 기쁨으로 휘파람을 불며 내 앞을 유유히 걸어갔다. 순간, 나보다 체격이 작아 보여서 달려들까 생각하는 찰나에 ‘살고 싶다면 가만있는 것이 좋을 거야.’란 의미처럼 총을 들고 있는 오른손을 위로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총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취기가 깨면서 모든 감각의 긴장이 풀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여행 후 4번째로 죽을 뻔했던 순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어이없는 웃음만 계속 내뱉었다. 모든 것들이 무슨 일인지 싶었고, ‘왜 내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란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우울증이라는 감정을 태어나서 처음 느끼게 되었다.     


절대 느낄 것 같지 않았던 그날의 감정


이전까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한심하게 생각했다. 왜 그렇게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고 인생을 쉽게 생각하는지 몰랐다. 영생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를 제외하면 인생은 한 번뿐이었다. 선택에 잘못이 있다면 그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를린의 그 날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한 달 후 런던에서 머물 때 자살소동이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얼마나 빚을 졌을까? 아무리 빚을 져도 목숨을 던질 만큼일까? 참, 한심하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하려는 그를 보며 ‘그래, 저들도 그들의 바닥을 보았겠지. 그런데 바닥이 단단하지 못해서 무너져 버렸겠지. 그들의 이유가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심하고 무능하고 잘못된 것이 아닌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사건이 아닌 소동으로 끝이 났지만, 한동안 소동의 주인공을 바라보던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살면서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피할 수 있으면 피했다. 우회로 간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직장은 많았고, 돈을 벌 수 있는 경우도 많았다. 한 사람이 싫으면 다른 사람을 만났고,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힐 것 같으면 일정조절을 통해 체력관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한계가 정점에 이르는 바닥이 되었을 때는 그러지 못했다. 무너지거나 다시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무너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살처럼 생을 마감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는 것에 ‘왜’와 ‘어떻게’를 붙이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공허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므로 일어나야 했고,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일어서야 했다. 모로코 메르주가에서 우울한 감정을 내뱉어서 숨 쉬게 되었고,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가치관이라는 것을 정립하면서 숨을 다시 들이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숨을 다시 들이마시다


얼마 전 <고마워 자존감> 저자인 채근영 여왕님(그렇게 부른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10년 동안 언어 심리상담을 하면서 바닥에 닿았던 많은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경우는 한 가지예요. 바닥에 닿는 경우죠. 바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죠. 나와 상담하는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었어요. 행동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살았죠. 그리고 변했어요. 그들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죠. 이전보다 훨씬 나은 삶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바닥을 겪어보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의 답은 아닐까 한다. 바닥에 닿아야 자신의 진짜 모습이 나오게 되고, 벗겨진 채 살갗만 남은 태초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바닥을 확인했다. 누군가는 아직 진정한 바닥을 못 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바닥은 내가 안다. 이것마저 타인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상대가 나보다 아프다고 내가 안 아픈 것은 아니다. 더는 없기를 바라지만, 그들 말처럼 더 깊고 어두운 곳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게 된다고 해도 예전보다는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내 모습을 보았고, 한 번 딛고 일어섰기 때문에 좀 더 자신이 생겼다. 딛고 일어설 방법은 자신의 가치관을 믿고 견디는 것이다. 참는 것이 아니다. 견디는 것이다. 견뎌야지 다른 기회를 잡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가치관은 버틸 힘을 만들어준다.


그렇다 해도 가장 좋은 것은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다.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 <답은 '나'였다>와는 달리 사진 몇 장을 첨가하였습니다.

(기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위클리 매거진 목차가 총 12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맥락을 이해해야 하다 보니 사진 몇 장을 넣는 것이 좀 더 공감하기 쉽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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