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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Apr 10. 2019

'다음'에 대하여

당신의 다음은 언제인가요?

영화 <버킷리스트>는 가난하지만 한평생 가정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정비사 카터와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이지만 괴팍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사업가 잭이 주인공이다.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카터에게 잭이 버킷리스트를 실현하자는 제안을 하고 그들은 하나씩 행동하게 된다.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 나도록 웃기, 스카이다이빙, 세계 최고 미녀와 키스하기 등 하고 싶었던 것을 상상이 아닌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행복했을까?’란 질문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왜 그제야 버킷리스트를 하려 하는 걸까?’라는 의문으로 바꾼다면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버킷리스트는 중세 시대에 교수형을 집행하거나 자살을 할 때 올가미를 목에 두른 뒤 뒤집어 놓은 양동이에 올라간 다음 양동이를 걷어차는 행위이며, ‘죽다’는 의미의 속어인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즉, 자의든 타의든 죽기 전에 꼭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뜻한다. 영화가 개봉된 2007년 이후 미국에서는 버킷리스트 작성 열풍이 불었다. 우리나라 또한 2009년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부터 버킷리스트는 종종 사용됐었으나, 대부분은 일부 특별한 사람이 하는 행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맞춰 가치관이 변해감으로써 자신과도 연관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 또한 여행을 시작한 동기가 버킷리스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하루는 150여 개 가맹점을 가지고 있는 프랜차이즈 업체 대표와 미팅을 했다. 그날따라 분위기가 좋았다. 그리고 “대표님. 내일 오후 2시에 뵙겠습니다.”는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제품 하나를 납품하기 위한 3개월의 노력이 결과로 나오기 직전이었다.

다음 날 오전, 업체 부사장으로부터 ‘어젯밤, 대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장은 괴정병원입니다.’란 문자를 받았다. 순간, 멍했다. 계약이 실패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아는 동생으로부터 ‘어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요. 서울에서 장례 치른대요.’란 문자를 받았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형이었다. 대표와 형 둘 다 돈도, 시간도 많은 사람이었다. 나이도 마흔 중반에 불과했다. 서울 장례식에 참석 후 부산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대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난주에 말이야, 필리핀에서 골프를 치는데 날씨가 아주 좋은 거야. 다음 주에는 유럽에 가서 칠 거야. 이게 행복이지 싶어. 성환 씨도 기계같이 직장에서 목메지 말고 얼른 사업 시작해서 돈 많이 벌어.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 인생 짧아.”


 .


'는 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며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당시에 6개월 동안 아침 6시에 집을 나와 새벽에서야 집에 들어갔다. 성난 파도에 힘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피곤함에 잠이 드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부모님께 퇴사한다고 말씀드릴 때도 특별한 연유를 묻지 않으셨던 이유였다.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남들 다 하는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버텼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려고 이것저것 발악하는 것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집에 도착하여 다음 날 미팅에 사용할 서류를 찾다가 20대 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책인 <시크릿>에 꽂혀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군 제대 이후 적어 놓은 버킷 리스트였다. 중간에 그어진 선을 기준으로 왼쪽에는 서른 살 전에 할 일 10가지, 오른쪽에는 죽기 전에 할 일 10가지가 적혀있었다. 순간, 내가 너무 초라했다. 죽기 전에 할 일은 고사하고, 서른 살 전에 할 일에서도 막상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돌이켜보니 버킷리스트 작성은 동기부여 강의에 참석했을 때 강사가 시켜서 적었었다. 그전에는 세세하게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이 없었는데 하나둘씩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내다 보니 종이에는 세계 일주, 작가, 동기부여가, 부자 등이 적혀있었다. 타인의 지시로 적기 시작했지만, 적다 보니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군 제대 이후 자신감은 충만했었고, ‘설마 7년 안에 못할까?’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못했다. 취업준비 때문에, 직장생활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에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또 다른 ‘다음’을 낳 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음’조차 흐려지게 되었다.

 

후회와 추억이 뒤섞인 어두운 공간 사이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것 다는 못해도 절반은 해보자,’는 뜬금없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표와 형처럼 돈과 시간이 많지는 않았지만, 나는 살아있었다. 언제 죽을지 몰랐지만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살아있음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만약 둘의 죽음이 없었다면 ‘다음에’는 ‘영원히 못 함’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나를 아는 나로서는 절대 못했을 것이다. 이전에도 수많은 장례식에 갔었지만, 슬픔 말고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는데 그들의 장례식은 달랐다.

‘내일 죽는다면' 이라는 가정이 나에게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죽는데 다음이 어디 있어?'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80세에 '그때 했었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하기 싫었다.


몇 달 후 퇴사를 선택하고 여행을 떠난 가장 큰 이유였다.



직장에 있을 때 거래처 사장에게 200만 원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사장은 다음에 갚겠다는 말로 1년을 미뤘다. 당시에는 돈 때문에 거래처 사장과 유대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있었다. 하루는 다음 날 갚겠다는 사장의 말에 거래처에 들렸지만, 그는 전날 밤 갑작스레 발생한 뇌졸중으로 인해 병원에 있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무언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 옆에 있던 환자가 울면서 간호사에게 “다음에 미국 여행 가려고 얼마나 돈을 열심히 모았는데, 암이라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갈 걸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생각한 ‘다음에’, 사장이 말한 ‘다음에’, 환자가 말한 ‘다음에’에 포함된 의미는 모두 달랐지만, 정해진 기약이 없다는 것은 같았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주인공 카터는 대학 시절 철학 교수에게서 이미 버킷리스트 작성이라는 과제를 받았었다. 당시에는 흑인 대통령 되기, 떼돈 벌기 등 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되면 좋을 것 같은 것을 적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이 ‘다음’의 순환 고리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는 죽음을 통보받고 나서야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적어보기 시작했고 잭의 도움을 받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죽음 뒤에는 다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제야 버킷리스트를 할 수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생각과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미래가 중요하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미래보다 뚜렷해도 너무 뚜렷한 현재가 좀 더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의 위험함을 인지하는 것이 좋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에 대한 타협으로 사용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이루어져야 하는 순간에도 망설이게 만드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먼저 게으름을 버려야 할 것이다. 대부분 게으름은 설거지, 청소, 다이어트 등 시간이 지나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발생한다. 시험을 치거나 출근할 때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는다. 게으름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설거지를 안 하면 파리가 꼬일 것이고, 청소하면 집이 깔끔해질 것이고, 다이어트를 하면 건강에 좋은 것과 같은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한다.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몇 시간, 며칠 뒤에는 하게 될 행동이다.


그리고 기한을 정해야 할 것이다. 게으름에 속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큰 목표를 달성하려 할 때 사용하지만, 사소한 일에 사용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5분, 내일, 한 달, 1년 등 달성을 위한 가상의 기한을 정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별로 행동을 점검해야 한다. 타인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공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신경 쓰며, 타인 때문이라도 기한 내 목표를 달성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유 없이 시작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행동에는 이유가 포함되지만, 이유가 만들어지지 않거나, 만들고 싶지 않을 때 시작은 물 건너가 버린다. 그럴 때일수록 일단 시작하고 봐야 한다. 시작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많은 사람에게 연락받았다. 취업이 아닌 글을 쓰는 길을 선택했을 때는 더 많은 사람에게 연락받았다. 사람들은 멋지다, 대단하다고 말했지만, 원초적인 궁금증은 ‘어떻게 그러한 선택들을 할 수 있었느냐?’이었다. 그럴 때마다 “여행은 언제 죽을지 몰라서 선택했고, 작가는 한 번 죽어보고 나니까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인들에게 건방지게 보일까 봐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했다. 그 말을 글로써 건네고 싶다.


“다음이라는 말에 속지 마. 다음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그때 할 걸이라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해봐. 진작 할 걸이라고 후회하지 말고, 그냥 해봐. 버킷리스트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돼.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다음에 보자고 했다면, 며칠에 볼지 정하기만 하면 돼. 그냥 해봐. 지금 해봐.”


당연히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매일 누군가에게 건네는 내 명함





책 <답은 '나'였다>와는 달리 사진 몇 장을 첨가하였습니다.

(기존 책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위클리 매거진 목차가 총 12개밖에 안 되므로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 맥락을 이해해야 하다 보니 사진 몇 장을 넣는 것이 좀 더 공감하기 쉽다는 생각이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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