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부산의 A 임대아파트에서 4년간 47명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인터넷 기사가 올라왔다. 사람들은 SNS와 각종 인터넷 카페에 기사를 공유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명했고, 불특정 다수는 공유된 글에 댓글로 각자의 의견을 남겼다. 대부분 안타까움을 이야기했지만, 누군가는 소위 돈 없는 사람들의 죽음까지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느냐고 말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일부의 극단적인 표현이긴 했으나, 꽤 많은 사람이 ‘임대’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 이면에 담긴 진실을 파헤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돈이 없어서 힘들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란 유추를 가장한 단언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술자리에서 A 아파트 이야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는 건축회사를 운영하는 분과 심리학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인 분이 계셨는데, 두 분 모두 임대아파트라는 여건상 재정적 상황이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점에는 동의하셨으나 그보다는 아파트라는 공간에 더욱 초점을 맞추셨다. 아파트는 공공건축물로서 사회적 관계 형성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데, 특히 현대인에게는 단순 거주와 투자의 대상으로 바뀌고 있기에 사회적 단절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두 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사회적 단절로 인한 외로움 혹은 고독이란 ‘감정’에 경제적 ‘현실’이 만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았겠느냐고 입을 모았다.
현대 사회에서 외로움은 심심치 않게 쓰고 듣는 단어인데, 아마도 성인 중에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한다. 외로움은 연결성에서 파생되는 감정이다. 무인도 어딘가에서 태어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홀로 살아가지 않은 한 기쁨, 슬픔과 더불어 대부분 느끼는 평범한 하나의 감정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외로움과 더불어 고독을 이야기한다. 고독은 외로움과 비슷한 홀로스러움을 느낄 때 사용하는데, 외로움보다 조금 깊고 진한 감정으로 느껴진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예전이라 말하던 때, 고독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철학과 같은 학문을 공부하던 사람만이 사용하던 특혜에 가까웠다. 그들은 고독을 연구했고, 사유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고독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는 듯하다. 나는 20대 시절 고독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없었음에도 마음이 쓸쓸하면서도 뭔가 생각에 깊게 빠져야 할 것만 같을 때 고독이란 단어를 감정의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어쩌면 허세를 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는 고독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고독은 죽음과 이어질 정도로 위험한 감정으로 치부했다. A 아파트의 일들과 비슷한 기사의 제목 및 내용에는 대부분 ‘고독사’가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고독을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지하고, 외로움과 고독의 간격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독사’로 명시된 공식화된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독사로 칭하는 죽음은 연고자가 없거나, 있어도 시신 양도가 포기된 죽음을 뜻하는 ‘무연고 사망자’ 통계에 포함한다. 사회가 고독을 불분명한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한다.
정신 장애에 관한 내용을 담는 『보소매거진』이란 잡지의 필진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필진에는 내용에 해당하는 이들이 직접 참여하는 점이 다른 잡지와의 대표적인 차별성이었다. 회의를 진행하면서 잡지에 담을 여러 파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고독을 소재로 하는 칼럼을 맡겠다고 이야기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종종 고독의 본질적인 의미에 부딪혔다. 여행하면서 여러 느낀 바가 있어서 고독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과연 내가 쓸 수 있을까, 써도 될까’란 스스로 만든 벽 앞에서 언제나 주저하고 말았다. 그런데 필진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몇 번의 자리를 함께 하며 고독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데는 ‘나는 그들에게 가진 특별한 편견이 없을 거야.’란 프레임이 깨진 게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알게 모르게 일정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고 있었다. 프레임이 깨졌다고 하여 겉으로 보이는 큰 변화는 없었으나 오랜 관념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기쁨을 벗 삼아 용기를 내었다. 고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여러 자료를 찾아가며 지식을 획득하고 사유하려 했다. 덕분에 예전보다 선이 분명한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으로 표기되어 있다. 외로움의 정의인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에서 ‘매우’가 덧붙여있는 격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고독을 외로움의 증폭 단계라고도 말하는데, 외로움 그 이상의 외로움이 더 알맞지 않을까 한다. 고독은 숙성된 와인과는 다르다. 외로움에 외로움을 더한다고 해서 고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외로움이 진해질 뿐이다. 솔로로 10년간의 외로움을 겪는다고 해서 고독에 이르지만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외로움은 외로움일 뿐이다.
영어권에서는 대게 외로움을 loneliness, 고독을 solitude로 쓴다. 혼자로서 느끼는 긍정과 부정인 감정을 이야기할 때도 최대한 분리하여 사용한다. 여행 중에 오랫동안 심리학을 공부하는 한 남미 친구에게 solitude에 관한 해석을 들은 적이 있다. 어근인 sol은 태양인 Sole에서 이어졌으며, 고독은 태양과 같이 근원적인 하나의 존재이자, 하나의 형태라고 말을 했다. 전형적인 남미식 억양 때문에 그가 건넨 의미를 온전히 해석하기는 힘들었으나, 남은 맥주를 들이키며 그가 건넨 마지막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고독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느 경계 너머의 선일 지도 몰라.”
고독은 형태이자 상태에 가깝다. 쓸쓸함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감정인 외로움과는 결이 다를지 않을까 한다. 외로움은 타인과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기반으로 두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특성상 사람과 멀어지는 불안은 본능에 가까운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 또한 그 사람과의 연결성에서 불러오는 불안 때문이다. 그 순간을 우리는 고독이라 말하지 않는다.
고독은 불안과는 일정 이상의 거리가 존재한다. 어쩌면 즐거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희열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될 정도이다. 왜냐하면 고독의 전제조건인 ‘나’를 찾고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독은 ‘나’를 느끼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한다. 자신에 집중하지 못한 채 느끼는 쓸쓸함은 타인에 의해 발생한 단순히 외로운 감정일 뿐이다. 자신에 집중하며 사유해서 발생하는 감정이 고독이며, 그 순간의 상태가 고독이다. 고독을 즐기는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웃사이더의 준말인 ‘아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혼자인 그 순간을 침묵하며, 그 순간에 나의 온전함을 조금 더 발견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남미 친구가 말한 ‘경계 너머의 선’이란 의미가 와 닿았다. 삶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고독의 의미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수 있음이다.
보소매거진 칼럼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어 A 아파트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을 고독사가 아닌 ‘외로움사’란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으로 갈무리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누군가는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기에 ‘외로움사’란 단어도 적절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글을 쓰면서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는데, 이 글을 통해 또다른 부족함을 발견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