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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Nov 17. 2019

05. 믿음과 깨달음의 경계

삶에 있어 종교란 누구에게는 길이자 삶 그 자체이며, 누구에게는 그저 부모에게서 대물림된 하나의 유산이며, 누구에게는 돈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은 한 가지 논쟁거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종교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무언가를 바라거나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는 본능에 의한 자연스러움으로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 인간이 사회에 학습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겠느냔 생각에 가까워진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 부모님에 의해 종교가 정해졌다. 내 의견은 어떠한 것도 반영되지 않았고, 철저하게 선택되어졌다. 어쩌면 강압이었다. 그러나 선택되어짐은 아무런 문제를 유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처님의 자비로 큰 사고 없이 살아왔음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부처의 존재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어머니의 말이었기에 이유 없이 그렇다고 믿었다. 어머니가 절에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쫄래쫄래 따랐다. 어린 시절 유독 채소를 싫어했지만, 절에서 비빔밥은 먹어야 했다. 어머니는 절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따라 했다. 부모님이 건강하기를, 내 성적이 잘 나오기를, 한국에 전쟁이 나지 않기를 빌었다. 당시에는 바람이라고 믿었던 크고 작은 불안이었다. 어머니는 열심히 빌면 이루어질 거라고 말씀하셨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기도 했다. 그러나 열 번 중의 한 번에 불과했다. 열 살 아이가 아는 종교는 그저 부모가 좋다고 해서 ‘믿는 척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삶에는 연이 존재한다. 연을 인지할 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초등학교 5학년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저녁에는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에서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피자, 통닭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로 다른 아이들을 유혹했고, 어느새 십여 명이 교회에 가는 것으로 암묵적인 약속이 이루어졌다. 나는 예외여야 했지만, “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교회에서 선물로 줄 거야.”라는 친구의 말에 넘어갔다. 


학원에 간다는 거짓말로 어머니의 눈과 귀를 가렸다. 교회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경품으로 갖고 싶던 장난감도 받았다. 집에 돌아와 몰래 교회에 간 게 들키면 어떡할까에 대한 불안이 있었지만, 일단 들키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배가 아팠다. 울면서 어머니를 불렀고, 응급실로 향했다. 내가 기억하는 생애 첫 응급실이었다. 의사는 무엇을 먹었는지 물었고, 나는 교회에서 먹은 음식을 이야기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이 들켰다는 것보다 아픔을 해결하는 게 중요했다. 내일 대형급 태풍이 온다 하더라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야 했다. 그날 이후 교회에서 하는 친구의 마술 공연을 보러 가기 전까지 7년 동안 교회 문을 열지 않았다. 입구 근처만 가도 그날의 아픔이 느껴졌다. 트라우마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종교를 ‘배신’해서 벌을 받았다는 죄스런 마음이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혼자서라도 꽤 열심히 절에 다녔던 이유였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서 절에 가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믿음의 농도는 옅어졌다. 군대에서는 초코파이를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서 교회와 절을 번갈아 갔다. 더 이상 복통은 없었다. 주위에 종교가 있던 친구들은 점차 무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년 한국 종교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교 인구는 총인구의 43.9%에 해당하는 2,155만 명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그렇게나 많아?’라고 하겠지만, 그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그것밖에 안 돼?’라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내 주위에서 4명보다는 많은 인원이 종교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05년 53.5%에서 10년 사이에 10%나 줄었음을 보여준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신을 증명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2030 젊은층과 고학력층을 중심으로 종교적 가치보다 세속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면 무언가를 바라보는 각자의 기준이 선명해진다. 누군가는 발등에 떨어진 현실적 불안을 보이지 않는 종교라는 가치로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로 세상은 구원될지라도 자신의 삶은 구원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진심으로 기도해도 원하는 회사에 취직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게 낫다고 스스로 판단한 결과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이러한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부처님오신날에만 절에 가기 시작했다. 연례행사에 가까웠다. 절과 멀어지는 거리만큼 믿음과도 점점 멀어졌다. 그저 종교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절은 언제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여행하며 좋은 나라를 손꼽을 때 미얀마를 빼먹지 않는 이유는 불교 국가인 것이 크다. 우리나라와 절의 모양은 다를지라도 같은 종교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라는 게 존재한다.


세계 일주하며 다양한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는 힌두교에서 소위 원숭이 신을 뜻하는 하누만(Hanuman)이 아닌 박제된 원숭이 자체를 신으로 모셨다. 자기 대신 차에 치였다는 이유였다. 누군가는 비슷한 이유로 오토바이를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여러 이유로 계속 논란이 되는 이슬람을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만났다. 


하루는 인구가 약 5만 명 정도 되는 아프리카 기니의 라베(Labe)라는 도시에 머물 때였다. 이슬람은 하루에 다섯 번 그들만의 종교의식을 가진다. 하루에 가장 활기가 느껴지는 오후 12시 30분 모스크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치 신의 음성인 양 대부분 자신의 업무를 뒤로 한 채 모스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도시의 활기는 각각의 모스크로 응집했다. 발 디딜 곳 없던 시장에는 아이들이 방해받지 않고 축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해졌다. 우리나라에도 한 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일상이 멈춘 듯 그 자리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히고 음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1~2분이 아닌 1시간은 자신의 자리를 비웠다는 점이었다. 그날을 기준으로 이슬람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도대체 그들이 믿고 따르는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불안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가 생업까지 놓을 정도의 이유가 되는 점이 상식에서 이해되지 않았다. 생명 연장을 불가능이 아닌 현실로 바라보는 21세기였다.


한국에 돌아와 친구에게 성경 보는 법을 배웠고, 이슬람 관련 서적을 읽었다. 집 서가에 묻혀 있는 케케묵은 전공 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절, 교회, 성당, 모스크에 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종교를 믿는 원천과 그로 인해 불안이 해소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원한고자 하는 답의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인문학 강연장에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님을 만났다. 그분이 강연 말미에 하신 “종교는 믿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안개 너머의 희미하지만 분명 길인 듯한 무엇을 발견한 듯했다. 다른 책에서도, 누군가의 입에서도 보고 들었던 말이었을 테다. 그런데 그날 유난히 또렷하게 내 귀와 마음에 담겼다. 


얼마 전 가족과 장흥 보림사에 갔다. 하늘은 흐렸지만, 가지산의 정기가 한눈에 느껴질 만큼 산세가 좋았다. 주말이었음에도 날씨가 좋지 않았던 탓인지 절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대웅전에서 절을 하고 문 앞에 앉아 절 중앙에 있는 삼층석탑, 산, 하늘을 한 선으로 바라보았다. 한순간 모든 불안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티끌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날 불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라짐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구심조차 품지 않았던 불안이 마법처럼 사라지는 찰나를 경험했다. 종교를 이해로 바라보는 시선을 내려놓았더니, 그제야 깨달음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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