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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Nov 17. 2019

03. 자녀는 부모에게 언제나 7살 철부지이다

나이가 들면서 만나는 사람의 폭은 넓어지지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의 폭은 좁아짐을 느낀다. 각자가 바쁘다는 이유를 들지만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와 우연히 연락이 닿을 때 건네는 안부도 이전과는 다름을 느낀다. 20대에는 반가움을 담아 취직은 했는지, 돈은 잘 모으고 있는지,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등 각자의 안부를 물었다면, 30대가 되면서 혹시나 하는 약간의 걱정을 담아 부모님은 잘 계신지를 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느새 우리네 부모님은 자연의 흐름 앞에 건강이라는 단어에 흠집이 하나씩 나기 시작하여 겨울 감기조차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나이대가 되었다. 어떠한 연유로 흠집이 아닌 큰 상처가 나는 순간 십여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햇살이 스며드는 병상 위 혹은 내 손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액자가 눈앞에 있는 곳에서 이뤄진다. 그러한 연유로 가끔은 친구에게 안부를 물을 때조차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아마도 친구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루는 스무 살에 추억을 함께 했던 한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되어 자연스럽게 친구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전화 너머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단편적인 면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 친구는 눈물이란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감정 표현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3년째 투병 중이었다. 친구에게 그 소식을 들은 순간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숙취에 정신을 못 차리던 두 아들놈에게 양파와 고추를 넣고 라면을 끓여주시며 “으이구, 술도 어지간히 마셔야지. 둘 다 잘한다, 잘해. 이거 먹고 얼른 속 풀어라.”고 하시던 친구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다. 친구는 여러 이야기를 이어가더니 내게 “엄마 옆에서 병간호할 때, 엄마가 날숨이 고르지 않은 날이 있어. 그런 날일수록 불안이 커지더라. 금방이라도 나를 두고 떠날까 봐.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바빠서 그런지 그렇게 친하진 않았거든. 그런데 내 곁을 떠날까 봐 두려운 거지. 이제 고작 엄마 나이 환갑인데. 부모가 떠나기 전에 잘하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게 된 거지.”라고 말했다. 친구와의 통화를 끊고 나서 얼마 후, 나는 친구에게 부고 안내를 받았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간다. 세상 그 무엇보다 단순하면서 명확한 진리이다. 언젠간 만나게 될 불멸의 시대에는 이 진리가 깨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삶이 끝나기 전은 아닐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건강하길 바라는 우리네 부모님도 자연의 섭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약한 한 존재일 뿐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녀가 부모의 죽음을 먼저 마주한다. 그 어떤 부모도 예외를 바라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의 마침표를 몸과 마음으로 준비한다. 누구도 바라지 않으나, 누구나 한 번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다. 자식이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문장의 마침표가 견디기 버거울 만큼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경제적인 노후생활을 책임질 능력이 되지 않더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하는 작은 이기심을 부모에게 투정 부려본다. 문장에는 쉼표가 많으면 가독성을 헤칠 때가 많지만, 부모의 삶에는 쉼표가 하늘의 별만큼 있기를 바란다. 


자식에게도, 부모에게도 가장 두려운 것은 한 문장이 끝나려면 아직 여백이 꽤 남았는데, 여백이 채워지지 않은 채 급하게 문장이 끝맺음되는 것이다. 그 순간, 불안과 두려움의 정도는 어떤 표현으로도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사랑하는 존재를 저 편 너머로 보내는 데는 일련의 준비가 필요한데, 갑작스러움은 충분한 준비가 된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무너질 여지를 남기게 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 수 있음을 19살에 처음 깨달았다.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온 밤 10시, 거실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를 바라본 그 순간이었다. 어머니를 들쳐 엎고 병원에 간 뒤 어머니가 다시 눈을 뜨기까지 걸린 3일은 생애 어떤 감정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참혹 하면서 고요한 순간이었다. 이전에 출간한 『답은 ‘나’였다』에 그 순간을 써 내려가며 마주한 심장의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데 19살에 겪은 감정을 얼마 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강의 일정을 마치고 밤 10시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았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에도 혈압약을 손에서 놓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저혈압 증상을 보였다. 내 삶이 끝나기 전까지 생각해본 적 없던 상황이었기에 처음에는 혈압기의 오류를 의심했으나, 몇 번이고 확인해도 기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뼈마디가 아파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셨고, 헛기침을 초 단위로 내뱉으셨다. 순간, 19살의 그날이 떠올라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병원을 권유하였으나, 어머니는 괜찮다고 계속 손사래를 저었다. 병원으로 논쟁을 이어가기에는 무의미한 듯하여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팔다리를 주무르면 헛기침이 멈췄고, 손을 떼면 심장을 부여잡고 헛기침을 했다. 혈압을 30분 단위로 쟀지만, 90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데 원고를 마감하느라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한 탓에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내가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몸은 괘념치 않고 피곤한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한사코 자신은 괜찮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방에서 쫓아냈다. 당연히 더 머물러야 했으나, 다음 날 있을 강연 준비도 마무리해야 해서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에 앉아 눈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헛기침 박자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박자를 벗어나 엇박자가 느껴질 때면 내 심장도 엇박자 위로 요동쳤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 4시쯤이 되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시계의 초침은 정박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숨결은 정지한 듯했다. 불안이란 허상이 현실이 되어 나를 마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찰나였다. 


‘드르렁’


어머니의 코 고는 소리가 적막을 타고 내 귀에 얹혔다. 온몸의 긴장이 풀려버린 탓인지,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하~”라는 한마디와 함께 뒤로 드러누웠다. 내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버린 채 허공을 헤매었고, 손과 발에는 어떠한 힘도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심장은 엇박에서 정박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이어짐에 감사함을 표했다. 본인은 모르는 불규칙한 운율스러움이 내게는 그 어떤 음악보다 위로가 되었다. 소리가 멈추면 불안했고, 격할수록 마음이 놓였다. 생존에 우아함은 무의미했다.


아마도 친구 어머니가 병상에서 힘들게 내쉬던 날숨에는 아들에게 전하는 안부가 담겼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들아, 나는 괜찮다. 피곤한데 어여 들어가 눈 좀 붙여라.’


자녀는 다 커서 스스로 어른이라 여길지라도 부모에게는 7살 사랑스러운 철부지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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