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을 때면 자연스러운 일인 양 TV를 켠다. 30분 내외의 길지 않은 시간이기에 인스턴트처럼 즐길 수 있는 예능을 선택하지만 국내외적으로 여러 이슈가 있을 때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지녀야 하는 의무감 같은 이유로 뉴스를 선택한다.
2016년 10월, 나라 안팎으로 여러 이야기가 있었다. 시국에는 관심을 두되 정치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생길 때였다. 그때만큼 밥 먹을 때 뉴스를 많이 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시국이든 정치든 ‘그런 것들’과는 담을 쌓고 사는 주위의 몇몇 사람을 만날 때도 그 당시의 일들은 항상 논쟁거리였는데, 각자의 기준에서 검증된 –객관적으로 보이려 하는 철저한 주관적인- 논리에 맞춰 일련의 행위에 옳고 그름을 이야기했다.
하루는 당시에 자주 보던 방송사 뉴스에서 하나의 이슈를 전달했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마셨던 전날의 과음이 다음 날 저녁까지도 해소되지 않았던 순간이었으나, 여러 의미로 대한민국 역사에 남을 한 사건의 시초 역할을 한 그 이슈는 그 무엇보다 선명한 순간이었다. 그날로부터 5일 후, 청계천을 시작으로 7개월간 전국에는 수많은 불꽃이 타올랐다. 내 주위에서도 많은 사람이 불꽃의 일부가 되었다. 각자의 이념은 달랐으나, 각자만의 불꽃으로 나라를 밝히려 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불꽃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이슈로부터 며칠 뒤에 5년간 다니던 회사 문을 열고 나와 긴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봤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필수인 예방주사를 맞고, 생존에 필요한 인스턴트 영어를 공부하고, 자주 만나던 지인들을 조금 만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한 시기였던 당시의 내게는 작은 불꽃마저 스며들 틈이 없었다. 적어도 10년쯤 뒤에야 현실이 될 것 같았던 퇴사와 이번 생애는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세계 일주는 내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시국은 매우 엄중했으나, 10일 뒤에 마주할 현실이란 파도는 높낮이마저 알 수 없었다. 불꽃이 한창 타오르기 시작하던 날 한국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여력이 없어서라고 여겼으나, ‘내가 아니어도’가 더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부끄러운 마음이다.
불꽃이 타오르던 7개월의 시간에 직접 닿지는 못했으나 여러 방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닿을 수 있었다. 지인들의 SNS에는 실시간으로 현장 정보가 중계되었고, 인터넷에는 초 단위로 기사가 올라왔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식별력을 가질 수는 없었으나, 의도치 않게라도 많은 정보를 획득했다. 현지에서 만나는 외국인들 중 꽤 많은 사람이 내게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사실과 나의 생각을 물었다. 특히 유럽 쪽에는 나보다 한국의 상황에 더 많은 관심을 두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가끔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종종 이렇게 계속 여행을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한국행 비행기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여행하는 동안의 행위 하나하나가 내게는 장엄한 역사였다. 개인과 국가의 역사를 비교할 수 없을지도 모르나 그 순간에는 내가 선택한 행위에 집중하려 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최대한 눈과 귀를 가까이 두려 노력했으나, 여행을 즐기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저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의 시원한 샘물보다 전날 내린 비로 나뭇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 더 시원하다.
지난 9월에 신간 출시 기념으로 토요일 오후에 교보문고 동대문점에서 북토크가 있었는데, 당일이 아닌 전날에 도착했다. 한 단체와 인터뷰 일정이 있기도 했지만, 동대문에 가기 전에 광화문에 들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점인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둘러보는 것과 더불어 내 눈으로 보지 못한 7개월의 역사를 뒤늦게나마 접하고 싶어서였다.
광화문역에 내려서 9번 출구로 발걸음을 향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램프 소리와 사람들의 거대한 함성은 ‘아, 여기가 광화문이구나.’란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했다. 출구와 가까워질수록 야구 경기장에서 홈팀이 역전 홈런을 쳤을 때 관중 함성 소리와 비슷한 울림이 느껴졌다. 3년 전과는 달리 대규모 집회가 아니었음에도 이 정도의 울림이라면,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였을까 상상하게 만들었다.
나를 비추는 햇살을 방향키 삼아 세종대왕 동상으로 걸어갔다. 동상 앞에는 광화문에 있다는 걸 인증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으려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상의 뒤편에서는 거대한 함성에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집회를 성공적으로 주최하기 위한 관계자의 노력 때문인지 얼핏 봐도 꽤 많은 인파가 모인 듯했다. 함성의 근원지에 관한 궁금증은 뒤로하고 동상의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청각, 언어 장애인들의 문화공연을 비장애인들과 향유할 수 있는 14회 수어 문화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부스에서 행사에 관한 안내를 들으려 해도 내게 안내를 하는 자원봉사자인 듯한 한 여성의 목소리는 함성의 진원지에서 울리는 파동에 잠식당해버렸다. 이런 상황이 오전부터 반복된 듯 그 여성은 꽤 지쳐 보이는 듯해 보였고, 나도 관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행사장을 잠깐 둘러본 후 교보문고로 발걸음을 향하면서 행사 관계자로 보이는 몇몇이 ‘이 사태’에 관해 여러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보편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달려온 오랜 노력이 천둥소리와 같은 순간의 울림에 무너질 수 있음을 염려하는 듯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의 눈빛은 불안을 토하고 있었는데, 작은 행사라도 기획하고 치러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짜증, 혼란 등이 담긴 부정적인 감정의 카오스였다.
광장을 뒤로한 채 교보문고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크고 작은 단체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시위와 집회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내 어깨를 붙잡고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충고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경찰의 눈빛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일관적인 시선이었다. 교보문고 앞에도 십여 명이 모여 작은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인원은 적었지만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소리가 교보문고 내부까지 닿을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는데, 매장 안에 머무는 동안 추측은 현실이 되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건물 입구로 향할 때 건물 앞 유리벽 바로 뒤에 있는 남색 계열의 정장을 입은 중년의 두 남성을 보았다. 한 사람은 입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가상의 원 안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 듯했고, 다른 한 사람은 유리벽에 기대어 건물 앞에서 이루어지는 집회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집회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했는데, 앞서 수어 문화재 행사장에서 보았던 관계자인 듯한 사람의 눈빛과 비슷했다. 그는 자기 뒤에서 일련의 해결책을 찾는 사람과는 달리 불안을 해결할 방법을 포기한 듯 보였다. 수심(愁心)으로도 부족한 그의 눈에는 기(氣)마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올 때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눈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을 뒤로한 채 매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이후 1년 넘게 광화문에 발걸음을 내딛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강의가 많이 줄어들면서 언제 다시 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길지 않은 시간 내에 그곳에 다시 방문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의 광화문이 내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역사의 순간에 내가 머무를지, 이전처럼 멀리서 관망할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집회의 공간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전까지 내게 광화문은 역사의 흔적을 대신하여 불안을 가득 담은 두 사람의 눈빛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