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쓰기 열풍이 불어왔고, 많은 사람이 여러 이유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요즘은 아이러니하게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아 보이는 정도이다. 독서량은 변함이 없는데, 매년 출간되는 책의 권 수는 늘어나고 있다. 나 또한 그 바람에 편승한 한 사람이며, 많은 사람이 바람에 올라탈 수 있도록 응원하며 실질적으로 돕기도 한다. 바람은 언제든 멈출 수 있다. 그러나 바람의 근원지 또한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믿음으로 글을 쓰며, 글쓰기를 전파하려 한다.
문자는 인간의 삶을 바꿔버린 혁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이 존경하는 인물 1위에 언제나 손꼽는 이유는 우리의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토록 경이로운 것이며, 문자가 쌓인 글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글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글이 너무 어려워진다. 예전에 글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닌 것을 보호하는 방패였고, 더 가지기 위한 칼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었고, 시대가 변했다.
글은 단순히 생각을 문자화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기 생각이 진짜임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글은 단순하지만, 복잡하다. 산수이기도 하지만, 리만기하학이기도 하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을 뜻하는 수포자에게는 몇 광년 너머의 일이다. 사실, 쓰기 2년 차에 이러한 정의조차 내리는 것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씀이며, 쓰는 사람의 특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특권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어요.’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권위에서 직함으로 바뀌는 중이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항해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글이 어렵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렵다는 것이다. 기술은 배우면 배울수록 능숙해진다. 흔히 전문가라 말할 수 있는 만 시간의 법칙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6,000 시간쯤에는 도달한 것 같다. 그렇다고 만 시간, 이만 시간이 흐르면 글 쓰는 기술은 능숙해질지 몰라도 어려움은 변함없지 않을까 한다. 이만 시간 이상에 해당하는 많은 분이 같은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글은 학문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學如不及(학여불급)이라 표현했듯이 배움(학문)이란 죽어라 쫒아가도 닿을 수 없는 고원의 경지이다. 그러나 글은 심리학이기도 하다. 심리학의 끝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 글은 쓰는 자의 몸과 마음 상태를 대변한다. 글을 오랫동안 쓰고 가르치는 분들은 상대의 글만 봐도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다. 무속인과는 엄연히 다르다. 나 또한 상대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상태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당연히 자신 또한 자신의 글을 보면 소름 돋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단, 자신의 글은 멀리서 바라보아야 보인다.
글은 단순하고, 복잡함을 넘어서 무섭다고 느껴질 만큼 날카롭다. 없는 빈틈마저 만들어 심신에 스며들어 무의식에 밖으로 꺼내 놓는다. 그것이 글이며,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이자,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 내가 지금 글이 어려운 이유는 결국 심신의 문제이다.
중학교 과학 시간이었다. 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먹물이 담긴 비커와 실험실 개수대에서 갓 담은 수돗물이 담긴 주사기가 있었다. 선생님은 먹물 위로 주사기를 살짝 눌러보라고 했고, 우리는 선생님 말씀대로 행동했다. 물은 주사기의 압력을 받아 먹물의 표면을 뚫고 비커의 절반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잠시 뒤 수돗물의 투명함은 사라지고 먹물의 혼탁함만이 비커를 감싸 안았다. 그 실험이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십 년 전 실험이 문득 생각났던 이유는 지금 나와 글의 관계 때문이다.
책이 출간된 후 지인들을 만나면 다음 책은 무엇을 준비하고, 언제 나오느냐고 묻는다. 글 쓴지 1년 6개월 만에 3권의 책을 출간한 것을 재능이자 능력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러면 나는 책이라는 게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하고 나올 수 있음이 아님을 먼저 이야기하고, 운이 좋았음을 이어서 말한 뒤 불안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고 답한다. 대부분 재밌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마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서 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출판사 대표님을 우연히 카페에서 만나 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눴고, 그분은 “현재 성환 씨에게 가장 적합한 소재네요.”라는 말을 건넸다. 위로가 담긴 현실이라는 화살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다행히 이전에 박힌 화살들 덕분에 박힐 공간이 없었다.
요즘, 내 마음은 혼탁하다. 수많은 강조 부사를 동사 앞에 내려놓고 싶지만, 그저 혼탁하다. 불안에 불안이 겹친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글이 있음에 안도한다. 글이라는 물이 마음 표면에 닿으면 접점은 맑아지고, 주위의 농도는 낮아진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글의 맑음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무의미해진다. 그러한 행위를 계속 반복한다. 어쩌면 의미 없는 행위의 반복이다. 그러나 접점에 닿는 그 찰나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작고 얇은 틈이라는 공간이 발생하며 그 사이로 숨을 한 번 내쉰다. 그리고 숨은 호흡으로 이어지며, 트인 호흡은 온몸에 피를 돌게 한다. 심장을 뛰게 하고, 뇌를 깨운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한다. ‘불안’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글 안에 감정이 매몰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는 것 또한 글이다. 이런 말을 적게 될지는 몰랐지만, 지금 내게는 글이 삶의 생명수다.
가끔 주위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현대사회에 뜬금없음이란 목적이 있음이며, 대부분 상업에 가깝다. 상대가 그러한 상업적인 의구심을 품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러나 단지 글 쓰는 노력을 응원하고자 함이라 했을 때는 상대는 고마움을 표한다. 감사를 받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하는 마음이 온전히 닿으면 그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나는 씀에 있어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보다 한 번 먼저 발걸음을 내디딘 한 사람일 뿐이다. 나도 가끔 글 쓰는 게 힘이 들 때 서점에 놓여 있는 내 책의 사진과 더불어 뜬금없이 안부 인사를 건네는 분들에게 수치화할 수 없는 기운을 받는다. 그 기운으로 먹물에 물 한 방울을 떨어트리는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맑아짐을 믿는다.
불안해도 불안을 글에 담을 수 있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