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글쓰기 그룹과외를 한다. 하루는 『어린왕자』 책을 읽은 후 학생들과 어른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글로 옮기게 했다. 글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었지만, ‘왜 어른은 커피를 좋아할까?’ ‘왜 어른은 돈을 좋아할까?’ ‘왜 어른은 담배 피고 술을 마시는 걸까?’와 같이 그들이 생각하는 ‘어른이기에’ 하는 행동에 대한 의문이 주를 이루었다. 그중 A는 여러 이유를 들어 어른이 되기 싫다고 했다. 그의 글에서 어른은 한가득 무거운 짐을 짊어진 짐꾼에 가까웠다.
나는 A와는 달리 어릴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는 사회가 어른으로 인정하는 나이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른은 두 남녀가 만나 짝을 이루는 행위를 뜻하는 옛말 동사 ‘얼운-’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미성년을 벗어나는 성년을 의미하는 성인(成人)과 다르다. 그러나 그때는 성인과 어른을 동일시했다. 다르다고 배운 기억이 없었고, 달리할 이유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행위가 어른이기에 용인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떠한 행위를 부정하는 어른들의 말에는 ‘넌 어려서 안 돼.’ ‘넌 어리니까 못 해.’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른은 무엇을 해도 되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도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에서 제일 느리다는 국방부 시계도 흘러가듯이 20년도 금방 흘러가겠지만, 더 빨리 흐르기를 바랐다. 아쉽게도 주위에서 키가 크거나, 똑똑하다고 해서 아이가 어른이 되지는 않았다. 철이 들어 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애어른도 그저 아이일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그렇게 바라던 어른이라고 생각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 마음대로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하고, 술 마시고, 여행하고, 외박하고, 원하는 물건을 구매했다. 그저 좋았다. 부모님은 자신이 걱정하는 선을 넘지 않는다면 잔소리를 동반한 걱정을 예전만큼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상대의 나이에 걸맞은 존중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허리가 뻐근했고, 어깨는 무거웠다. 몇십kg의 돌덩어리가 종일 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을 알아챘을 때는 불안과 책임감이란 이름으로 이미 오랜 시간 축적되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 짊어지던 학업의 무게와는 다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라고만 생각했다. 누리는 자유만큼 그 정도 스트레스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하고, 술 마시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함께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런데 내려놓은 무게 이상의 짐이 다시 얹혔다. 그러면 다시 스트레스를 풀었고, 다시 그 이상의 짐이 얹혔다. 가끔 ‘나만 이런 걸까?’란 의구심을 품었지만, 무의미했다. 내 주위가 그랬고, 그들의 주위가 그랬다. 결혼한 친구들은 “네가 부양할 가족이 없어서 그 정도야.”라며 위로했고, 생각할 시간에 행동하는 게 낫다는 주의인 B는 “쓸데없는 걱정 그만해.”라는 말로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B도 짐을 내려놓으면 그 이상의 짐을 가졌다.
사람은 어느 순간 어른이 된다. 사전적 의미뿐만 아니라 무게를 견디면서 알게 되는 현실에서도 성인과 어른은 다르지만, 기준을 막론하고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는 ‘그때’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른이 갖춰야 하는 덕목 한 가지를 요구한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기뻐도 상대가 기분 상할 수 있으니 적당히 기뻐야 하고, 힘들어도 누구나 그러니 힘든 척하지 말아야 하고,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아도 우는 건 보기에 좋지 않으니 울지 말아야 한다. 기뻐서 소리치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슬퍼서 ‘꺼이꺼이’ 눈물 콧물을 흘려도 경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랜 시간 만들어진 기준에 맞춰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스스로 그렇게 하려 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약한 사람, 혹은 어린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가끔은 어른을 놓고 싶을 때가 있다. A가 생각하는 지고 있는 짐을 ‘툭’ 하고 바닥에 내려놓는 것이다. 기쁘다고, 힘들다고, 슬프다고, 울고 싶다고, 위로받고 싶다고 어린아이 장난감 사달라고 떼쓰듯 누군가에게 투정부리며 칭얼거리고 싶다. 옆에서 혀를 차며 “어른이 되어서 저게 뭐 하는 짓이야?”란 말을 들을지언정. 우리는 20년의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었고,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어른은 감정을 느끼고, 감정을 풀고 싶은 ‘평범한 사람’일뿐이다.
하루는 부산역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글을 쓰다가 뭔가 막힌듯하여 노트북을 닫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시의 내 마음과는 달리 맑았다. 그 순간을 즐기려 했다. 그런데 옆에서 “성환 작가님 맞으시죠?”라는 목소리가 순간을 깨버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어느 자리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미팅이 있는데, 상대가 30분 정도 늦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 앞자리를 빌려도 되느냐고 나에게 묻기에 흔쾌히 괜찮다고 말했다. 다행히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요즘에 건강을 챙길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게 지낸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바쁜 만큼 건강을 챙겨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이야기에 맞장구쳤다. 그는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나에게 한 마디 물음을 던졌다.
“요즘, 괜찮으시죠?”
어느 자리에서나 물을 수 있는 안부였지만, ‘잘 지내시죠? 어떻게 지내세요? 바쁘게 지내시죠?’와 같이 흔히 듣는 질문과는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무방비인 상태에서 무언가에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아팠다. 그는 내 책과 SNS를 보며 여러모로 힘든 시기일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힘내라는 말을 전하기에는 뭔가 선을 넘는듯해서 괜찮느냐는 말을 던졌다고 했다.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살짝 웃으며 그에게 “당연히 괜찮죠.”라는 말을 건넸다.
버스에서 내린 후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렸다. 우산이 없어서 가로등이 비추는 건물 지붕 밑에 잠시 자리를 옮겼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낮에 카페에서 만난 그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그에게 건넨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생각했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거짓을 말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아니요. 요즘에는 괜찮지 않아요. 힘드네요. 눈물도 날 것 같고요. 쳇바퀴 위를 도는 다람쥐가 되기 싫어서 퇴사도 하고, 여행도 하고, 글 쓰는 일도 하는데, 다른 회사의 제품일 뿐 쳇바퀴인 것은 변함없네요. 그것도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쳇바퀴네요. 그래도 감사해요. 걱정해주셔서.”라고 대답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어른이었다. 거짓을 말할지언정 힘들다고 투정부리지 않는 평범한 어른이었다. 아마도 그가 나의 상황이었어도 비슷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잠시 후 비가 그쳤고, 나는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올해 상반기에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인 김나영 가수가 부른 ‘어른이 된다는 게’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사진 속 웃고 있는 아인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슬퍼도 웃어야 하는 걸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알았던 나인 걸까
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드는 게 다들 말하는 어른이 된다는 걸까
나는 아마도 슬퍼도 웃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