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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내일 Nov 17. 2019

07. 신은 내게 불안을 선물했다

삶에는 ‘때’가 존재한다. 예전에는 자기계발과 관련된 저서 및 강연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을 넘어 내 책과 강연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이야기하는 삶의 가치가 되었다. 어설픈 믿음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삶을 원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다. 삶에서 건강 다음으로 값지게 생각하는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시간 낭비는 사람에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자연스러움을 부정하려는 것 또한 사람이므로 가능한 행위이다. 


그리스어로 ‘때’는 χρόνος (Cronos)와 καιρός (Kairos)로 사용한다. 크로노스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시간을 의미하며, 카이로스는 ‘그 시각’에 사용되는 시점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때’는 카이로스에 가깝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앞머리는 숱이 많고, 뒷머리는 벗겨져 있으며, 양발에는 날개가 있는 카이로스 신을 뜻하는 기회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기회란 현시점보다 더 나은 결과를 바라는 상태를 기반으로 둔다. 예를 들어 이직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기존 회사보다 네임밸류가 좋거나, 연봉을 포함한 근무환경이 좋을 때 기회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회란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때’ 또한 기회와 같이 선택이 주어지는 상황은 같지만,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가정을 두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때’를 이야기할 때 삶의 전환점으로 표현하려 한다. 전환점의 결과도 기회처럼 그 순간의 시점보다 나아지기를 바란다. 인간은 욕심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러나 기회와는 달리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조금 더 가깝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생애 처음으로 ‘때’를 맞이했다. 타고 있던 차량이 옆으로 굴렀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다행히 삶의 끝자락에서 얇디얇은 가는 실을 붙잡고 기어 올라와 다시 한 번 찬란한 빛을 마주했다. 그날의 이야기는 이미 집필한 두 권의 책에 담았다. 내가 글을 쓰는 한 계속해서 언급되겠지만, 이번에는 두 권에 담지 못한 한 가지 이야기를 적으려 한다. 


사고 난 지 3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경찰차와 응급차가 도착했다. 경찰은 십여 분간 사고 상황을 파악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지, 그제야 나에게 응급차에 탑승하라고 말했고, 그는 현지인 신고자와 이야기를 더 나눴다. 내가 서 있던 곳과 응급차의 거리는 뛰면 5초, 걸으면 15초 정도였다. 그러나 걷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사고 당시 발에 박혔던 잔유리를 손으로 빼냈지만, 통증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였다. 그런데 순간 복숭아뼈 아래에서 눈가에 눈물이 핑 돌만큼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였다. 그중 북극성과 손으로 세 뼘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별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신이 한 번의 삶을 더 주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음성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유 없는 이유는 없다고 믿는 나조차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문득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종교가 있어서인지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종교가 있음에 믿는 정도였다. 꿈에서조차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를 본 적은 없다. 당연히 열렬한 신자도 아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면 절에 가지 않는 해가 대부분이었다. 누군가에게 신이 있으니 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해본 적도 없다. 종교가 없던 친구를 데리고 절에 간 적은 있으나 종교로서가 아닌 공간으로서의 방문이었다. 그런 내가 신이 준 기회를 핑계 삼아 ‘때’를 끌어안았다. 별이 눈에 담긴 찰나의 순간, 내게 다른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별이 이끄는 순리대로 행동했다. 


순리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자연 그대로의 행위, 즉 자연의 질서를 말한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물길을 타고 유유히 흘러간다. 물은 저수지에 고일지언정 거슬러 오르지는 않는다. 거슬러 오름은 순리를 벗어나는 역행을 의미한다. 역행을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순간을 누군가 바라본다면 놀라움과 함께 불안을 느낄지도 모른다. 자연의 역행은 인간에게 불안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사회라는 물줄기 안에서 살아왔다. 가끔 물방울이 높이 튀어 가까운 바위 위에 안착하기도 했으나, 줄기의 흐름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미비아 사막 길 위에서 별 하나를 본 순간 소용돌이치듯 물줄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나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다. 폭포를 거슬러 오르려 했다. 깊은 산 속 어딘가에 고여 있을 작은 샘물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수의 눈에는 역행이었으나 내게는 순리였다. 나는 이러한 순간을 적확한 ‘때’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물줄기는 내게 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좁은 물줄기에서 파도가 휘몰아치기도 했고, 소용돌이에 휩쓸려 길을 헤매기도 했다. 다시 길을 찾았음에도 불안했다. ‘이것이 정말 순리라고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루는 꿈을 꿨다. 불빛 하나 없는 곳에 내가 서 있었다. 암흑이라 말할 수 있었다. 발밑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한 발자국조차 떼기 힘들었다. 용기를 내어 두 발자국을 내밀었다. 그러나 벽에 막혔다. 반대쪽으로 네 발자국을 걸었고, 다시 벽을 만났다. 그제야 내가 서 있는 곳이 1평 남짓한 공간임을 알았다. 그저 한 공간에 있음인데 두려웠다. 분명 꿈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이 떨렸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마주한 쪽에서 작은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을 향해 몇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다시 암흑이었다. 그 어떤 빛도 용납하지 않았다.


땀에 젖은 등이 축축해서인지 잠에서 깨었다. 셔츠를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너머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잠든 지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셔츠를 갈아입고 다시 누웠다. 그런데 문득 ‘신은 내게 벌을 주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내가 삶의 전환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택할 것을 알았다는 듯이 선택에 따라오는 짐의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가는 나를 관망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불교에는 여러 지옥이 존재하는데, 그중 죽은 자를 심판하는 10명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이 있으며, 그들을 명부시왕(冥府十王)이라 한다. 영화 <신과 함께>에 나왔던 7 지옥을 관장하는 7명의 심판관이 10명에 속한다. 나는 마치 커다란 죄를 지어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심판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한 생각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고, 한숨은 한동안 허공에 맴돌았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들지 않았다. 만약 신이 벌을 내린 거라면 헤쳐갈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그리고 글을 적었다. 내가 신에게 전하는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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