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직장 살아남기

이성 직원 많은 '백화점'

by 구독함

이 글은 특정 성별에 대한 비하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기에 오해 없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대 초반에 L백화점에서 근무를 했다. 오전에는 여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무 업무를, 오후에는 침구류와 주방가전 매장 직원들과 소통하며 간단한 심부름 업무를 했다. 소통하는 직원이 모두 여자였기에 보고 듣고 느낀걸 간략히 적어보겠다.

이건 첫 번째 레슨, 점심 메뉴 선정에 진심이다.


11시부터 카톡방에서 점심 메뉴를 두고 회의가 시작된다. 떡볶이, 피자, 햄버거 등 각자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한다. 식당, 메뉴, 인테리어, 가격대 등등 디테일의 끝을 보여준다. 여직원들의 점심 메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스포츠팬이 유니폼 선수 마킹 고민하는 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때 누구의 편도 들어서는 안되고 "아무거나 먹자"라는 말로 찬물을 뿌려서도 안된다. 점심 메뉴가 한 개로 좁혀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메뉴가 하나로 통일이 안될 수도 있다. 떡볶이파, 피자파, 햄버거파로 나뉘어 따로 먹을 때도 있다. 속으로 '아니 이럴 거면 처음부터 각자 먹고 싶은 거 먹으면 되지 왜 1시간 동안 카톡 한 거지?' 생각이 들어도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된다. 무슨 음식 먹으러 쫓아가야 하냐고? 가장 적극적으로 같이 가자는 쪽이나 사람 많은 쪽을 따라가는 게 위험이 적다.


이제 두 번째 레슨, 공평한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오후에는 각 브랜드 매장마다 돌아다녀야 했는데 애교가 넘치는 분이 있었다. 매장으로 올 때 본인의 브랜드 물건 하나씩만 들고 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그리 무겁지 않은 물건이기에 부탁을 몇 번 들어주니 같은 층, 같은 브랜드 업계 직원들한테 소문은 금방 퍼졌다.


그 이후부터 다른 브랜드 사람들도 "우리 짐도 가져와줘" "우리 거도 부탁해" 등 감당할 수 없는 만큼 요청이 쏟아졌다. 처음부터 해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해줬다가 안 해주는 건 상대방에게 더 신뢰를 잃는 행동이기에 다 들어줬다. 어리석었던 나는 해줄 수 있는 만큼 해주다가 원래 업무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사무실 남자 직원이 정리를 해주는 바람에 지옥에서 벗어났다. 내가 애교 넘치는 분을 좋아해서 물건을 가져왔다는 소문이 퍼지는 걸 감수해야 했다.


드디어 세 번째 레슨, 여왕벌은 건드리지 말기


여직원들 사이에서도 위계질서가 있다. 우두머리 격인 여왕벌 한 명이 있었는데 다 같이 웃고 떠들다가도 여왕벌에게는 심기를 건드리는 농담을 하면 안 된다. 같은 아르바이트생이었어도, 나이가 어려도 여왕벌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리더십이 있었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농담하면서 친해지고, 친해지기 위해 농담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기분이 나쁠만한 농담을 면전에 대고 하지 않는다. 농담을 해도 당사자가 없을 때 하기 때문이다. 나도 여왕벌에게 심기를 건드리는 농담을 했다가 왕따를 당해본 적이 있다.


이상한 남자만 자꾸 만나서 슬프다고 하자 나는 "안목을 조금 키우는 게 어떻겠냐"라고 했다가 갑분싸가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밥도 혼자 먹고 조용하게 일만하다 퇴근을 했다.


마지막 네 번째 레슨, 컴퓨터나 힘쓰는 건 솔선수범


컴퓨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여자들 사이에서는 전문가가 돼야 한다. 정말 간단한 업무인 프린터 고장이 대표적이다. 프린터가 갑자기 안 되는 경우나 용지가 끼었을 때는 대처법을 알아놔야 한다. 사실 나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하는 건데 "저도 몰라서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하는 거예요. 인터넷 찾으면 다 나와 있어요"라고 말하면 안 된다. 열심히 고쳐주면 간식이라도 더 챙겨준다.


사무실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힘을 써야 할 때가 있다. 정수기 물통 교체나 물건이 갑자기 많이 들어올 때가 있다. 이때 뺀질뺀질 뒷걸음질 치면 안된다. 가장 먼저 앞장서서 해야 하고 투덜투덜 대거나 지시도 하면 안 되고 묵묵히 해야 한다. 센스 있는 여직원이라면 같이 도와주거나 "저는 뭐 할까요?"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그때 부탁하면 된다.


----덧붙이는 말 ---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있었던 일입니다. 남중, 남고, 군대를 다녀온 저로서는 여초직장이 설레기도 했지만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곳이라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여자 아르바이트생 동료들이 군것질도 잘 챙겨주고 연애 고민도 잘 들어줬습니다.


지금도 온라인상에서 남초직장이 좋다, 별로다, 여초직장이 좋다, 별로다 라면서 다양한 경험담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어느 모임이냐에 따라 다르고 어느 사람이 모이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독자님들은 인지하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남초나 여초 모임 경험이 있으신지요?

keyword
이전 10화31가지 질의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