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장난
*
헤어지거나 죽으면 넌 어떡할 거야? 하고 묻고 답을 듣는 걸 즐겼다. 웬 악취미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럴 가능성도 있고,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몇 프로는 언제나 죽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럴 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해놓으려는 방어기제다. 이 가정법의 좋은 점이 또 있다. 상대가 없다고 가정하면 지금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 와닿는다. 부재에서 소중함을 되찾는다. 느슨해진 마음에 긴장감이 든다.
말하자면 ‘재난식 사랑법’. 불안을 극대화해서 사랑을 깨닫는 방식이다. 상대가 사고를 당하거나 할 때의 구체적인 상황과 감정을 상상하려 했다. 이렇게 끝에 대한 상상력을 높이고 여러 갈래로 대비해 두려 했다. 대비해봤자 실제로 당하면 시뮬레이션했던 건 하나도 생각 안 날 테지만. 미리 안전할 때 예습을 하면 실전에서 덜 고통스럽겠지.
지호는 이렇게 말했었다. “헤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염두에 두는 편이야.” 내가 화들짝 놀라 뭔 소리냐고 했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래야 지금이 더 소중하고 최선을 다하게 되니까.” (혹시 이거 둘러댄 건가?)
그런데 만약 매력적인 이성이 접근했을 때 유혹 안 당하리라고 100% 확신할 수 있을까? 과거 연인들과 권태기든 뭐든 헤어져 봤는데 지금 얘랑도 헤어지면 어쩌지?
그렇게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를 항상 놔두는 거다. ‘어쩌면’의 자리. 어쩌면 헤어질 수도 있고 누군가 죽을 수도 있고 사고당할 수도 있고 사랑이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그 자리가 있음으로써 현재 사랑의 자리가 더 귀하게 보인다.
상상은 사랑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보호하는 거다.
*
어릴 때 했던 뽁뽁이 장난감도 생각난다. 불안한 손가락은 허공을 떠돌다가 뽁뽁이를 누르곤 했다. 그러면 뭔가를 붙들고 누르고 있다는 안정감이 생기고 뾱 소리가 나며 공기가 터져나갔다. 터질 때의 쾌감과 소리가 중독적이어서 한참 책상 아래에서 손을 놀려댔다. 불안이 내 몸을 압도하게 되면 뭔가를 누르게 된다. 주먹을 꽉 쥐거나 이빨을 압박하면서 갈거나. 그러면 안에 있던 공기는 다른 데로 폭 삐져나갈까?
내 마음도 그랬다. 표현해서 입 밖에 내버리면 다른 데로 새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커져도 자제를 하려 했다. 애정이 과해지면 상대가 질리거나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런 식으로 애정이 터져 바람이 빠지듯 식어가는 상상을 했다.
걱정이 많은 편인 우리는 그냥 터놓고 얘기하기로 했다. “우리 이제 무슨 감정이 들던지 다 얘기해 보자.”라면서. 이때까지 좋은 감정이 생기면 누르기만 해왔다. 기대하고 실망하는 게 싫어서 방어기제를 가동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쳤고,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해지면 불안해지는 마음이 올라오지만, 그걸 그냥 바라보고 지나 보내야겠다고. 공기가 터질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
재난식 사랑법처럼 극단적으로 가정해 보면 상대를 대신해 죽을 수도 있었고 유산을 다 내놓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상 불행/희생’을 과장하며 서로를 웃겼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끔찍한 상상이 웃음을 유발하다니 이상한 일이지만. (‘좋아서 죽겠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웃기고 이상한 표현이다.) 죽음 직전에서 할 법한 근엄한 행동만이 애정의 크기를 온전히 담을 것 같았다.
이렇게 연습하다보면 나중에 죽음 앞에서 초연하게 웃을 수도 있지 않을까. 웃는 모습으로 서로를 추억하는 것은 슬프지만 숭고한 일일 것이다. 행복을 느껴봤으니 여한이 없다는 마음도.
연애 초반과 지금의 대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초반의 우린 이렇게 묻고 대답했다.
“내가 죽으면 어떡할 거야?”
“어떻게 하면 빠르고 쉽게 따라 죽을까, 고민 상담할 거야. 민정이 없음 못사니까~”
그랬던 지호는 이제 장난기와 본색을 드러낸다.
“내가 죽으면 어떡할 거야?”
“너가 죽어도 난 너 몫까지 살 건데?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서 순장하자.”
또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너가 죽어서 내가 자살을 했어. 근데 사실 넌 안 죽은 거였고 나 혼자만 죽은 거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민정 : 암보험 들라니까 빨리!
지호 : 보험비가 아까워. 암을 내가 이길 거야. Defeat Cancer, 암을 이긴 남자.
민정 : 안돼, 암보험 사망보험 들어야 내가 나중에 돈 받지.
지호 : 그거 아니라도 민정이한테 많이 남겨줄 거야. 해리포터 부모님이 그린고트 금고에 유산 남긴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