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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키세라믹 Oct 18. 2024

교회에 가신다는 어머니

어머니는 불교 신자

어머니는 불교 신자다. 이런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가 되셨다. 아니 정확한 표현은 교회에 가신다라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외할머니는 일상복으로 법복을 입고 생활하실 정도로 불교에 가까우셨으니 모든 이모님들과 어머니는 불교 쪽에 분명 영향을 받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다니시는 절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셨다. 초파일에는 가장 큰 연등으로 불교행사의 기대에 부응하셨다. 아버님이 별세하셨을 때에는 절에서 천도재를 올려 드렸고 아버님을 절에 모셨으니 불교에 가까우셨던 것은 맞는 말이었다.


아내의 처가에는 큰처남이 장로이고 처형들이 교회 권사이시니 기독교 집안이다. 불교신자인 시어머니와 기독교 신자인 며느리와의 관계는 일상의 고부관계와 다르지 않았지만 종교적으로 대립하고 척을 두지는 않았다.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고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며느리의 입장에서 시어머니의 종교를 배척하고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시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내의 종교에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내는 일 년에 12번의 제례에 관여했고 어머니는 당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실 뿐이었다. 종교와 무관 해도 말이다.


종교 때문에 고부간의 심한 대립이나 갈등이 없는 것만 해도 양쪽의 신앙이 추구하는 넉넉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강한 힘을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아버님의 천도재에 며느리가 참석해서 스님의 예불과 짙은 향내 속에 고개를 숙인 모습은 시아버지 때문인 것은 분명했다. 아내는 유연했고 나는 고마웠다.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 아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겪으신 수모는 낯 뜨거운 일이었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이마저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어머니의 병세는 정상범위의 경계 치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약속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셨고 전화번호를 기억하기 어려워하셨다. 

핸드폰은 누군가를 기억 속에서 불러와 그와 연관된 전화번호를 유추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어느 한 단계에서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셨다. 


예를 들면 오래도록 벌초를 해주셨던 분의 번호를 기억하지 못하셨는데,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벌초는 기억하시고 벌초라는 단어로 벌초하는 분에 대한 범주를 생각해 내셔야 하는데 벌초까지였다. 벌초는 했지만 누가 벌초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십 년의 세월과 매해 이루어졌던 벌초가 통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단계적으로 미루어 짐작하거나 유추된 개념을 가져와 시작으로 사용하지 못하시고 있었다.


십 년 동안 추석을 전후해서 여섯 분상을 벌초해 주신 분은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도 이제는 벌초를 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라며 부탁에 앞서 거절했다.


한분은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한분은 어머니의 다양한 요구 조건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억이 엇갈리는 경우도 있구나 싶었다. 


어머니의 개종(?)과 기억의 편린이 조각나기 시작한 것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논리의 지나친 비약이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세는 당신의 과거와 현재를 혼재하여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기억력이 조각나기 시작했어도 사십 년의 세월이 통으로 내려앉아 자신이 시주했던 연등의 불빛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으며, 이러한 퍼즐은 당위성을 가지기에 부족했다. 어머니의 병세는 분명히 시작점에 있었다.


기독교인 아내는 어머니에 대한 구원의 기도를 단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아내는 아내의 방식대로 늘 유연했다. 어머니의 오대봉사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제기가 버려질 때까지 일관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어머니의 종교적 성향(?)이 달라진 것이 아내의 말로는 함께 지내는 중학생 외손자의 권유가 있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어머니의 개종이 조카의 권유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내가 잘못 전한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나의 기억을 외곡 시킬 수 없음을 나는 자신했다. 하지만 아내는 지지한 계획의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어머니의 기억이 왜곡된 기억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낯선 풍경을 마주 하신다 해도, 그곳에서 과거를 회상하시는 꿈을 꾸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선한 영향력을 믿고 싶었다. 

초록색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회색을 초록색으로 보시고 즐거워하신다면 그것은 하나의 믿음이 될 것이고 낯설기만 한 기억 속에서 행복하셨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어머니의 기억은 먼 곳으로 왜곡돼 가고 있으며, 어머니는 그보다 더 먼 곳에 계시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가신다고 하거나, 어머님이 늘 계시던 연등의 불빛아래 계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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