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75년 겨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 삼 남매는 국민학교 2학년부터 2년 터울이었다. 아버지에게는 부모님과 삼 남매가 가족으로 남았다.
외 할아버지 기일에 참석하셨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니 외가에 모인 어머니의 형제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두 배의 슬픔으로 내려앉았을 것이다.
이후 외할아버지의 기일에는 외가에 모인 다른 형제들에게는 참석하지 못하는 동생과 언니의 슬픔도 함께였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혈육에게는 예기치 못한 고통이 기억의 이름을 가지고 쌓여 가기 시작했지만, 슬픔을 기억하는 이들이 나의 주변에 너무 많았다. 아픔과 슬픈 기억의 색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마나 슬프셨을까?
그때까지 우리는 음력설을 지내다가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발령으로 처음 양력설을 지냈고, 외할아버지의 기일이 음력설의 아래 아래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설준비에 여유로웠다.
1975년의 겨울에 인천에서 수원까지 길을 나서는 것은 부모의 기일이 아니면 쉽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아마도 겨울눈이 내렸으면 어머니의 발걸음은 선택의 기로에 있을 수도 있었다. 우리 형제의 건강이 불편했거나 알 수 없는 무엇이라도 어머니를 보내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어머니는 발걸음을 내딛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눈은 오지 않았다.
우리는 새해를 앞두고 저학년의 학급 반장처럼 들떠 있었다. 철없던 우리의 슬픔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고 어머니의 외출을 막을 수 있었던 일은 필요 없는 침묵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늘 출가외인의 친정 나들이는 쉽지 않았지만 모든 여건은 어머니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멀리 떠밀어낸 슬픈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슬픔과 함께.
나는 가정을 이루고 나서 어머니가 수원까지 발걸음을 하셨던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어머니의 삶이 그렇게
짧아야 했던 슬픔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살았다.
왜 한 번도 경우의 수에 없던 양력설을 보냈고 그런 경우의 수가 생겼을까 지나가는 투정거리로 생각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은 전생의 업까지 뒤덮여 이어지셨겠지만 우리는 어머니가 안 계신 불편함이 전부인 나이였을 뿐이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다.
맏이인 나는 서둘러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닮아 가고 있었다. 어린 동생들을 살뜰하게 살피거나 학업에 진심을 다하지 못했다. 우리가 어린것처럼 나도 어렸다.
나는 사춘기를 경험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의 사춘기는 무엇과도 어울려 지나가지 못하고 한없이 가뭇없는 슬픔으로 남아 나를 외롭게 했다.
나는 또래의 아이들과 같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의 애어른 같은 사고방식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결코 나에게 없어도 되는 삶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잔설처럼 내려앉아 무게를 더해가는 세월도 많지 않았으니,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기억은 사륵거리는 소리보다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세월에 묻혀 갔다.
어머니의 부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철 지난 계절을 미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하며 살았다. 통증은 인지하고 바라보고 나서도 한참 뒤에 따라왔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삶을 살았던 나는 그것이 부모의 입장에서 가장 큰 아픔이라는 것도 가정을 이루고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통증은 사라지는 날이 없었다. 잠시도 그 아픔이 멈추는 날도 없었다. 어머니의 통증은 이미 광목치마를 타고 올라오는 젖은 물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불효한 아픔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오래전에 지나쳐 왔다. 우리의 삶에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결정되기도 한다.
또한 우리의 모든 고백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만 되돌아보면 나에게 적당한 해방구는 없었으니 이제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려는 노력이 자연스러울 뿐이다.
마음속에 존재했던 날카로운 삼각형의 트라이앵글이 수도 없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심한 고통에 힘들어했지만 그것마저도 굳은살을 만들어 세월을 함께 했다.
모든 것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참아내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이유인 것을 늦은 때에 알게 되었다. 우는 소리가 크다고 그 아픔이 큰 것은 아니어도 그 속은 얼마나 매 순간 들썽거리고 있었을까?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고 짧게 말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픔을 간직한 많은 이들에게도 저마다의 사연은 가장 큰 슬픔이기 때문이다. 유난을 떨지 말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흙바닥을 굴러가며 한쪽 팔은 꿰지도 못하고 머리를 풀어 슬픔을 소리 내는 것처럼
오로지 나에게만 이토록 가혹했다고 애 먼 소리를 내고 싶다.
사라질 수 없는 고통은 아마도 나의 세월과 같은 무게로 곁에 있을 것이다. 때로는 무감하게 때때로 말끄러미
바라보는 야망스러운 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유난스럽지 말아야 한다.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가라앉아 있는 슬픔을 다시 흔들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은 나를 다시 그 시절의 어린아이로 되돌리려 하고 있으며, 아이의 슬픔은 어른의 슬픔보다 내게는 크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슬픔은 나의 고통보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