久雨後謾書壁間 비가 오래 내린 뒤 벽 사이에 대강 쓰다

by 노정

久雨後謾書壁間 비가 오래 내린 뒤 벽 사이에 대강 쓰다 / 申翊聖 신익성


人苦久雨時 사람들은 비가 오래 내리는 때를 괴로워하지만

我喜久雨後 나는 비가 오래 내린 후에 즐겁다네

陰洞棲雲氣 그늘진 골짜기에 구름 기운 깃들고

幽徑濯塵垢 그윽한 오솔길 티끌 먼지 씻어낸다네

餘霞散作綺 남은 노을은 비단처럼 흩어지고

萬縷穿疏牖 만 가닥 빗줄기 성긴 창문 뚫는 듯하네

閑階覆綠苔 조용한 계단은 푸른 이끼로 덮이고

小池開紅藕 작은 연못에는 붉은 연꽃 피어나네

扶藜晩夷猶 지팡이 짚고 느지막이 유유자적하노라면

且得靜中趣 고요함 속의 흥취를 또 얻는다네


신익성(1588년~1644년)이 쓴 이 한시는 오언으로 된 고체시로, 오랜 기간 내린 비 뒤에 드러나는 고요하고 맑은 세계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제목 속의 ‘만서(謾書, 대강 쓰다)’는 공을 들인 수사보다 순간의 감흥을 따르는 시인의 태도를 드러내며, 억지 기교가 아닌 자연스러운 표현의 진정성을 예고한다.

이 시의 1구를 보면,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리는 비를 괴로움으로 느끼지만, 시인은 2구에서 “我喜久雨後(아희구우후)”라고 밝히며 비 갠 뒤의 정취를 반긴다. 이 역설적 시선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온을 찾는 옛 선비의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시 속 풍경은 촘촘하고 섬세하다. 이 시의 3, 4구에서는 그늘진 골짜기에 구름 기운이 깃들고, 오솔길 티끌이 씻겨 세상이 깨끗하고 맑음을 읊고 있다. 5, 6구에서는 비단 같은 노을과 빗줄기가 성긴 창을 통과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시각적 아름다움을 빚어낸다. 7, 8구의 “閑階覆綠苔(조용한 계단은 푸른 이끼로 덮이고), 小池開紅藕(작은 연못에는 붉은 연꽃 피어나네)”는 시각적인 효과를 주고 있으며, 아울러 계단의 이끼와 작은 연못의 붉은 연꽃을 통해, 정적 속에서도 솟아나는 생명력을 부드럽게 드러낸다. 마지막 9, 10구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거닐며 ‘고요함 속의 흥취’를 얻는 장면으로 수렴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풍경 감상을 넘어, 마음을 비우고 속도를 늦추어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자족의 철학을 전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불편함 뒤에 찾아오는 맑음’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분주함을 잠시 멈추고 자연과 마주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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