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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세상을 만나는 기적이다

by 걷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 고속도로의 버스 전용도로조차 막힌다. 많은 사람들이 가을의 끝자락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여행을 떠나고 있다. 고속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다. 결국 고속도로를 벗어나 옛 길로 빠져 이동한다. 주변 경치와 마을 구석구석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는 호젓한 옛길로 이동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지난주에 41코스 일부를 걷고 마쳤는데, 그 마친 지점인 마둔 호수에서 걷기 시작한다. 호수 주변에 낙엽아 깔린 푹신한 길은 매우 아름답다. 왼쪽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단풍이 가득한 산 사이에 야자수 매트를 깔아놓은 소로를 걷는다. 호수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나무 주변에 떨어진 꽃잎이 가득하다. 호수 위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어 호수는 갤러리가 되고, 우리는 그림을 감상하며 걷는다. 물이 많으면 뿌리는 썩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물속에서 자라는 나무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각자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간다.


이 길을 가을에 만난 것은 행운이다. 오늘 걷는 선운산의 단풍은 매우 아름답다. 선운산 자락의 석남사에서 출발해서 정상(547.4m)에 오른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고, 평상들도 많이 설치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 사실을 평상의 숫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정상석에서 함께 사진을 찍는다. 언젠가부터 산의 정상에 오르면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또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단풍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임도로 조성된 길은 넓고 평평해서 오르기에 편안하다. 단풍이 터널을 만들고 길가에 뿌려진 꽃잎이 꽃길이 만든다. 모든 사람들이 꽃길만 걷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꽃길을 걷기 위해서는 이곳까지 올라오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한다.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자연의 꽃길과,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공기, 그리고 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낙엽이 가득한 길, 꽃이 뿌려진 길, 단풍이 터널을 만들어준 환상적인 길, 그리고 좋은 길동무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선운산 정상에서 청룡사 방향으로 내려와 주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메뉴는 산채 비빔밥. 적당한 밥의 양과 다양한 야채 음식과 반찬, 그리고 푹 익은 김치가 산을 오르고 내리느라 지친 몸을 회복시켜 준다.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서로에게 축하를 건넨다. 도토리 묵무침과 김치 부침개 등 안주가 막걸리와 잘 어울린다. 할머니 집이라는 이 식당은 유명한 곳인 듯 어느 유명 연예인이 주인장 노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2대째 이어지는 식당으로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그의 모습도 선하고 편안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골 인심과 시골 음식 맛이 걷기 여행 즐거움을 더해준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맛난 음식을 먹는다. 여행의 재미는 떠나는 일, 떠나기 전 설렘,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음식, 그리고 자연 풍광을 보고 즐기는 일이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내려왔던 방향으로 조금 올라간다. 식사 후 오르막을 걷는 것은 쉽지 않지만, 산의 단풍이 고된 산행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함께 걷는 길동무들과 수다를 떨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즐겁게 걷는다. 종종 경기 둘레길 안내 리본이 방향을 잘못 안내하고 있어서 헤매기도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다. 어린아이에게 모든 주변 물건과 상황이 놀이가 되듯, 우리에게도 길에서 펼쳐지는 모든 환경이 놀이가 된다. 좌성사 방향으로 올라가 탕흥대에 오른다. 탕흥대에서 바라보는 아래 마을 풍경은 일품이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앞이 시원하게 트인 정상에서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며 가슴에 호연지기를 담아 본다. 하산길은 제법 길고 가파르다. 낙엽이 가득한 하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낙엽 아래 도토리 같은 열매들이 숨어있어서 가끔 발이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이 또한 좋은 추억이다. 포도박물관 방향으로 내려와 마을 구경하며 걷는다. 늦은 오후 시간임에도 아직도 밭에서 일하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분들 뵙기가 조금 송구스럽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바라본 노을 풍경이 아름답다. 영화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삶의 마지막 순간에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고 독백하는 영상이 떠오른다. 노을을 보고 있는 자신과 노을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하고 있는, 또는 보고 있는 모든 대상과 하나가 될 때,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다. 무언가를 더 붙여도 옥상옥이 되고, 떼어내려고 해도 쓸데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걷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길을 걷는 것이 아니고 또한 길이 우리의 발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길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다. 문득 종이 한 장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가 필요하고, 나무가 성장하기 위해 햇빛과 비와 온도가 필요하다. 나무 벌목꾼이 필요하고, 운송수단과 기사가 필요하고, 제지 공장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종이가 되어 우리 손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종이 한 장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만나는 것이고, 그 노고의 결정체가 우리 손에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이 한 장은 온 우주와 세상을 품고 있다는 말은 진리이고 진실이다.


길을 걸으며 온 세상을 만난다. 아내가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간식도 준비해 준다. 전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한다. 누군가는 전철을 만들고 운전해준다. 역에서 길동무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한다. 길동무들은 각자 자신의 세계가 있다. 그들의 세계가 만남 덕분에 우리에게 들어온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기사님이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버스를 만든 사람들이 있고, 운전해 주는 사람이 있다.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호수 주변에 아름다운 길을 조성해 놓았고, 바닥에 야자수 매트도 깔아놓았다. 누군가는 절을 세웠고, 주변을 가꾸어 놓았다. 누군가는 나무를 산에 심었고, 정상에 평상도 만들어놓았다. 식당에는 밥과 음식을 만들어 팔고, 누군가는 그 재료를 만들어 제공한다. 동호회라는 모임을 누군가가 만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헤어진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늘 만나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인연이다. 확률 상 거의 불가능한 만남이 오늘 걷기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매우 희귀하고 고마운 인연이다. 길을 걸으며 세상을 만난다. 단순한 걷기가 더 이상 단순한 걷기는 절대로 아니다. 걷기는 세상을 만나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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