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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Oct 26. 2020

내가 아이패드 드로잉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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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말 아이패드와 애플펜슬을 샀다. 유행하기 시작하고 한참 뒤에 산 것이다. 함께 일하던 대학생들이 아이패드를 모두 갖고 있었을 때 이게 요즘 필수품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갖고 있지 않았을 때는 이게 그림이 얼마나 잘 그려질까 싶었다. 펜과 종이보다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직접 테스트해본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종이에 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많이 늦었구나 싶어 부랴부랴 비상금 통장을 깼다.  

   

  아이패드를 받자마자 무료 드로잉 프로그램부터 다운받았다. 내 주변에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를 위해 유튜브를 시청했다. 자꾸 알고리즘의 유혹에 넘어가긴 했지만, 기본 기능과 관련된 영상을 많이 보았다. 단순히 전자기기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었는데도 퇴사 후 바로 시작한 작업이라 피로도가 굉장히 높았다. 일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지쳐버렸기 때문에 한동안은 기기를 만지지 않았다.     

  기운을 차린 몇 달 뒤 아이패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기본적인 사용법만 익힌 후 바로 그림을 그려봤다. 다양한 브러시 툴을 사용해보기도 했다. 지금은 자주 쓰는 브러시를 정해둘 만큼 익숙해졌지만, 그때는 모든 게 어려워 무작정 시도해봤던 것 같다. 밑그림을 종이와 연필로 그린 다음, 사진을 찍어 따라 그렸다. 밑그림이 있으니 훨씬 수월하게 그려졌다. 비뚤어진 선을 자동으로 가다듬어 주는 기능을 이용해 매끈한 선을 그었다. 그리고 풍요하리 제작소 스티커를 만들었다. 고양이인 풍요와 쥐 캐릭터인 하리를 선으로만 그려보다가 채색도 해봤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작업인데 그때는 엄청나게 부담되고 헤맸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되고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배송된 스티커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니 정말 별 것 아니지만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그린 그림이 디자인되어 물건이 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신나는 일이었다. 내친김에 에어팟과 스마트폰 케이스를 만들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지인을 위해 커스텀을 하여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작업이 나와 잘 맞았다. 어떤 제한이 없다는 것이 매력적이었고 그림 그리는 일이 더욱 즐겁게 느껴졌다. 언젠가 우리 브랜드를 정착시켜 한정판 굿즈를 만들어보는 게 꿈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익은 그림 실력을 맛있는 과실로 만드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가 지나고 또 한동안은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종이와 연필, 수채화로 그림을 연습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드로잉을 오랫동안 하지 않으니 다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막상 다시 그려보면 예전과 같이 그릴 수 있는데 그 심리적 장벽이 실천을 주춤하게 했다. 또, 동영상을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영상 편집용으로 아이패드를 사용했다. 동영상 편집을 하면서 이 기기는 정말 쓰임이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용한 애플리케이션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웬만한 영상 편집을 하기에도 좋다. 온라인 전시회를 위한 모든 영상 편집을 아이패드에서 진행했다. 처음에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본전 이상은 하는 것 같다. 그때 조금 더 고사양으로 살 걸 하며 후회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 듣기 시작한 디지털 크로키 수업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업이 자극제가 되어 매일 아이패드로 간단한 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그림이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의 일러스트가 되었다. 간단한 그림조차도 단계를 밟으며 하나씩 숙련시키며 완성해간다. 처음부터 바로 잘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아이패드를 사면 바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때가 있다. 그건 정말 착각이었고 약 1년 남짓한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손이 풀린 것처럼 조금씩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여기서 하나 느낀 점이 있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전반적으로 이럴 거라는 점이다. 한 단계씩 천천히 발을 내디뎌 성장하는 것. 묵묵히 참고 내 길을 가는 것 말이다.

 


[그림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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