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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Oct 26. 2020

왼손 드로잉 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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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정말 안 그럴 줄 알았다. 내 말이 다 맞다 우기는 그런 어른 말이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도 다양한 관점과 방식이 있는데 내 생각만 바르다고 우긴다. 왼손 드로잉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오른손도 제대로 못 그리는데 왼손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못 그릴 이유 수천 가지가 떠올랐다.

     

  동네 배움터에서 온라인으로 운영하는 태블릿 PC 크로키 강좌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크로키에 대해서 누구한테 배우고 그린 게 아니어서, 나는 대체로 두꺼운 선으로 그리는 캐릭터를 그렸다. 겉보기엔 그렇지 않은데 그림에 있어선 깔끔한 선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삐져나오거나 울퉁불퉁한 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드로잉 앱에서 자동으로 완성해주는 선에 기대어 예쁜 선 그리기에 급급했던 지난날들이었다. 강사님은 조금 자연스러운 선을 사용해서 그리는 것이 어떻냐고 하셨다. 자연스러운 선이 무엇일까? 반년 동안의 그림 습관 덕에 내 오른손은 이미 깔끔한 선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때 언니가 자유로운 선을 위해서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순간 심리적 방어막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내가 어떻게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냐고 발끈했다. 언니가 밑져야 본전이라며 한 번 그려보라 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왼손으로 그림 그린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한 번 그려보자 마음먹었다.

     

  왼손 그림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오른손 그림보다 자유롭게 그려졌다. 형태도 나쁘지 않았다.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다니, 그것도 느낌 있게 그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작은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두려워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해보고 나면 별 것 아닌 일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이제껏 해보지 않았다고 주춤하며 가던 길만 계속 걸어갔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이래서 내가 변화가 없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뒤로 꾸준히 왼손 그림을 그렸다. 날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나아졌다. 왼손 그림은 다른 내가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왼손으로 그리면 사물에 대한 시선도 조금 달라지는 게 느껴졌다. 또, 다른 펜을 사용해서 그려도 그림 실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하면 됐던 건데 왜 그렇게 망설였을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니 조금 다른 나를 발견하는 느낌이 들었다.

     

  왼손 그림은 혼자서만 하기 아까웠다. 분명 다른 사람들도 숨겨놓은 재능이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우리 언니는 원래 왼손잡이여서 잘 그렸다. 그래서 평소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는 사람부터 매일 그리는 사람까지 다양하게 왼손 그림을 그리도록 독려했다. 결과물을 보니 오른손만큼 더 멋진 그림을 그린 것 같다. 한 번도 그리지 않았다고 했으나 몇 번 그려본 사람처럼 그림을 그려냈다. 그리고 반응들이 한결같았다. 생각보다 잘 그리는 본인 실력에 놀랐다는 것이다. 잘 사용하지 않은 손에 대하여 과소평가했던 거다. 왼손이 그간 많이 섭섭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왼손 그림을 먼저 시작한다. 그럼 어김없이 오른손에도 기분 좋은 자극이 가는 느낌이다. 다른 그림도 그리고 싶어진다. 두 손이 서로 소통을 하는 것 같다. 그림 그리기가 두렵거나 뭘 그려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왼손 그림을 먼저 그려봤으면 좋겠다. 대상은 앞에 있는 사물 아무거나 고른다. 왼손은 어떤 그림 결과가 나와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 믿고 있던 오른손 말고 못 미더운 왼손으로 그린 그림이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림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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