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과 희망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계획도, 용기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일이 벌어졌다. 일하던 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 폐업을 하게 된 거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회사라는 울타리가 먼저 사라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벌어진 건 아니었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고, 건축 건설 업계 전반에 침체의 기운이 꽤 오래전부터 들리워져있었다. 그래도 설마, 했었다. 마음 한 켠에 그렇게 남아 있었다.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2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온 회사였고, 그 시간 동안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버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존재해 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안전망이 되지는 못했다. 경기 침체는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여러 건축 관련 여러 회사들을 멈추게 만들었다.
회사는 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사무실에 남아 도면과 자료를 정리하고, 하나 둘 비워지는 것들을 보며 회사에서의 시간을 정리했다. 그렇게 나는 그 회사의 마지막 설계 직원으로 문을 닫고 나왔다. 스스로 나가겠다고 결심한 퇴사가 아니라,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나오게 된 시간이었다.
물론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나름 퇴사 후를 조금이라도 준비를 해서 나오고 싶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계획을 세우고 마음의 각오를 하고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뒤에, 다음을 선택하고 싶었다. 회사 밖 현실은 나의 속도를 존중해주지 않았고, 아니 허락조차 해주지 않았다. 준비를 한다고 해서 바로 무언가가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었고, 막상 세상으로 나와보니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질문 앞에서 나의 답은 선명하지 않았다. 정말로 선명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완전히 빈 손, 빈털터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돌아보면 나는 오랫동안 기록해 온 사람이었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블로그에 글을 써 왔고, 그 안에는 여행의 장면들, 책을 읽고 남긴 생각 조각들, 커피를 마시며 기록해 둔 감정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과물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붙들고 있던 필사적으로 만들었던 나의 조각들이었다.
기록들이 당장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는 알 수 없었다. 해결책이 되어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엇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말이다. 퇴사를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것들은 이미 내 삶의 중심 가까이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있었다. 그냥 나는, 나에게 생긴 변수로 인해 억지로 방향을 튼 게 아니었다. 그저 계속해 오던 방향 위에 서 있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좋아하는 것을 오래 하며, 진지하게 놓지 않았던 내가 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모여, 지금 내가 있는 이곳까지 데리고 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