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없으면 취업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계기 (1)

by 빨간모자

스토리가 없어서 자기소개서에 쓸 말이 없었다. 처량했다.

감정의 감옥 속에서 조용하고 외롭게 생활하던 나는 어느덧 4학년이 되어버렸다. 결국, 취업의 문턱에 와버렸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기엔 나는 아직 두려웠다. 그리고 취업에 필요한 중요한 것이 없었다. 바로 스토리였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없었던 나로서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지?'가 늘 고민이었다. 진로 고민을 대학생활 내내 했지만, 무릎을 탁 칠만한 결정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족 등의 주변 사람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졸업생들이 가는 진로를 나도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평범하게 회사에 취업하기로 했다.


취업과 관련해서 가만히 손 놓고 있기에는 너무 불안했다. 이대로만 늙어가면 받아주는 곳 하나 없어, 밥벌이도 못하며 방 속에서만 콕 박혀 지낼 것만 같았다. 어떤 것을 앞으로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먼저 설정해야 했다. 그래서 4학년이 되기 직전의 겨울방학 때, 대학생들이 자주 하는 대외활동과 청년인턴에 여럿 지원했었다. 남들을 따라가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 혹여나 선발되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했었다. 집단활동은 감정적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함께하는 여러 사람들과 못 어울리지는 않을까, 내가 또다시 사람 때문에 상처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도 지원해야만 했다. 부모님께 사회생활도 못하는 부끄러운 아들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었다. 감정의 감옥 속에서 지낸 약 4년의 기간 동안 공부는 참 열심히 했었다. 밖에 나가서 할 일이 없어서 그랬다. 학기 중에는 학교 공부를 했고, 방학 동안에는 전공 관련 자격증을 여럿 취득했다. 지원서는 그럭저럭 작성했다.


그런데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려고 보는 순간 당황했다. 자기소개, 지원동기 등 뻔한 문항을 제외하고, 생소한 것들이 있었다.


'집단생활을 하면서 팀원 간 불화를 해결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지원 직무 분야와 관련된 직무수행을 통해 문제해결능력을 발휘한 경험이 있습니까?'
'상대방을 성공적으로 설득했던 경험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시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경험의 내용, 과정, 결과에 대해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


대외활동 지원 자기소개서에는 지원자가 여러 사람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문항들이 있었다. 청년인턴 지원 자기소개서에는 지원자가 필요 직무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조직생활에 적합한 인재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문항들이 있었다. 위의 문항들처럼 직접적으로 질문하지 않아도, 단지 자기소개나 자신의 장점 등의 단순한 문항에도, 사회성이 좋은 지원자인 것처럼 작성해야 한다. 과거에 합격했던 사람들의 후기를 여럿 읽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취업 관련 특강, 교육에서 전문가들은 스토리를 통해 자기소개서 문항에 답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기만의 스토리를 서술하여 심사관이 궁금해하는 점을 실증적으로 증명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대외활동에 합격하려면 여러 사람과 어울린 경험을 통해 사회성이 좋은 사람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인턴에 합격하려면 지원한 직무 분야, 회사(기관)와 관련된 (조직생활) 경력 or 경험을 통해 직무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성이 좋은 사람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 지원한 직무 분야, 회사에 따라 필요한 직무능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스토리가 없으면 대외활동이든 인턴이든 어떤 직무능력이든 뭐든, 역량을 증명조차 할 수 없다. 즉, 자기소개서에 쓸 내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깨달았다. 스토리가 없다면 취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정의 감옥에 나를 가둬놓고 매일을 사회와 단절하며 지낸다면, 나는 평생 백수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찌릿한 불안감이 그런 것이었을까.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디뎌야 할 것 같았다.


과거를 끊임없이 성찰해봤자, 나만의 스토리 따위는 없었다. 알바나 자원봉사, 기업 서포터즈 등 해본 게 아예 없었다. 사람들과 북적북적 어울려 본 것은 군대 말고는 없었다. 자기소개서 문항을 몇 번이고 읽어보면서 '나는 참 재미없게 살아온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차저차 일단 내용을 채워 넣었다. 군대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적어 넣었다. 거짓말을 적어서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면 자괴감이 들 것만 같았다. 최대한 솔직하게, 사회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적었다. 내용이 빈약해서 처량한 자기소개서였다.



스토리가 없어서 면접에서 할 말이 없었다. 실소(失笑)했다.

예상했듯이, 서류전형에서 대부분 떨어졌다. 그래도 모 대기업의 대외활동 한 곳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뭘 보고 나를 면접에 불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의아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불안해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으니까.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을 두려워했던 나는 면접이 정말 두려웠지만, 한 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취업의 문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다는 희망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었다.


면접 날, 쭈뼛쭈뼛 면접장에 도착했고, 면접 순서가 되었다. 면접 도중에 난 탈락을 직감했다. 나 이외에 4명의 지원자가 같이 면접을 봤었는데, 모두 스토리가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렸던 경험에서 나온 스토리였다. 마치 스토리가 하나의 스펙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 사람은 단과대학 학생회 임원이었고, 두 사람은 학교 내 동아리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이미 여러 대외활동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나만 아무 경험이 없었다.


경험이 없으니 어필할 만한 스토리가 없었다. 팀원 간 불화를 해결해본 적도 없었고, 리더십을 발휘한 적도 없었고, 여럿이서 문제를 해결해본 적도 없었다. 면접관 입장에선 스토리를 통해 지원자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스토리를 들어보며 지원자에 관한 궁금한 점을 떠올리고, 질문하게 된다. 스토리가 아예 없었던 나에 대해서는 당연히 궁금해할 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은 "지원한 동기가 무엇인가요?"와 "4학년이면 취업준비 때문에 바쁠 것 같은데, 활동을 성실하게 할 수 있으신가요?"였다. 처음에는 한동안 아무도 나에게 질문하지 않아 당황했었다. 다 끝나갈 무렵, 딱 형식적인 두 질문만이 나에게 허락됐다.


결과는? 당연히 떨어졌다. 나는 애초에 서류전형에서 떨어질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통보했을까 의문이었다. 자조적(自嘲的)인 실소(失笑)가 모니터 앞에서 조용히 터졌다. 취업에 대한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용기를 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이대로 살아간다면 영원히 방 안에서만 지내게 될 것 같았다. 만약 코딩을 배웠었으면 개발자를 했을 테고, 그림을 잘 그렸으면 일러스트레이터를 했을 텐데.. 프리랜서를 할 만큼의 특별한 재능이 나에게 있진 않다고 생각했다. 개인 사업을 하기엔 성격이 안 맞을 것 같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긴 싫었다. 그때 당시에 내 눈엔 회사원이라는 선택지밖에 안 보였다. 집-학교, 집-학교를 오가는 대인기피 학생에게 적합한 직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때가 되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취업만이 살 길인 것 같았다. 취업을 하려면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스토리가 있으려면 감정의 감옥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래서 난 한 발자국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필사적인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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