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을 하며 필수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조별과제에서 난 늘 발표를 맡았다.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대부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난 일부로 나섰다. 대학생에게 흔히 주어지는 기회이면서, 낯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사교성이 높은 사람에게도 힘든 일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과 친하게 잘 지낸다 하더라도, 발표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 또는 소수와 대화하는 것과 다수와 대화하는 것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의 규모가 다르고,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누구나 떨리는 것이 당연하다.
하물며, 감정의 감옥에 갇혀 타인을 멀리하는 나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일이었다. 앞으로 조별 과제를 할 때 발표를 도맡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난 내가 드디어 미친 줄 알았다.
처음으로 발표에 도전했을 때가 떠오른다. 금융경제학 수업이었는데, 교수님이 정해주신 주제 중 조별로 하나씩 골라, 그에 대해 조사하고 발표하는 조별과제가 있었다.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앞으로 발표를 자주 해보겠다고 생각만 했었다. 막상 용기는 없었는데, 정신이 나갔었는지 역할을 정할 때 발표를 하겠다고 실제로 말해버렸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냥 저질러 버린 일이었다.어떻게든 될 거란 마음으로, 더 이상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정말로 발표를 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고, 긴장돼서 미치는 줄 알았다. 발표를 듣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못한다고 비웃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이 어색해 보일 것 같았고, 바보처럼 보일 것 같았다. 남들 눈에 한심하게 보일까 봐 걱정되었다. 발표 중에 공황이 와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게다가 조원들도 비협조적이었다. 회의도 대충대충, 과제도 대충대충, 거기에 일부 조원은 예의도 없었다. 똥을 싸놓은 과제 때문에 스트레스는 누적되었고, 발표자인 내가 잘해야 그나마 C를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한테 말도 못 걸면서 왜 발표를 하겠다고 말했는지 후회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었다.
실력이 부족하면 떨린다
감정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야만 했다'. 전처럼 과거를 회상하며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용기를 내야만 했고, 잘 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전략을 고심했다. 어떻게 하면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의 감옥 안에 있는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고심했다. 다른 학생들의 발표를 그대로 모방할 순 없었다. 남들보다 더 잘해야만 했으니까. 잘해야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았다.
발표를 하기 전, 오들오들 떠는 것은 실제로 발표를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망칠까 봐, 망신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본인의 원래 실력이 낮으면, 망쳐서 망신당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불안할 만한 것이다. 떨지 않으려면, 실력이 좋아야 한다.
그래서 발표를 하기 전, 난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것만 지키면, 적어도 평균 이상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1. '대본'을 만들지 마라
발표는 다수의 사람들과 하는 대화이다. 일상 속에서 소수의 사람들과 하는 대화가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게 말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본'이라고 일컫는, 발표 내용이 적혀있는 글을 보며 읽는다. 발표를 '말하듯이'가 아닌, '읽듯이' 한다. 발표는 분명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행위인데 말이다. 책을 읽는 것처럼 발표를 들으니 재미도 없고, 흥미도 안 생긴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많은 학생들은 발표를 하든지 말든지 고개를 푹 숙이고 스마트폰을 본다.
대본을 작성하면 문어체로 발표하게 된다. 문어체는 구어체보다 상대적으로 더 어렵게 느껴진다.어려운 단어를 쓰기 때문에 이해가 쉽지 않다. 글자는 이해가 안 되면 여러 번 읽으면 되지만, 말은 한 번 들으면 끝이다. 들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내용에 흥미가 안 생긴다. 그래서 구어체로 발표를 해야 하는 것이다. 대화를 할 때는 어려운 어휘를 적게 쓴다.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쉬운 말로 바꿔서 다시 말하기도 한다. 구어체가 상대적으로 청중이 이해하기 쉽다. 청중은 어려운 걸 싫어한다. 머리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쉬운 어휘를 써야 내용이 쉬워진다. 발표 내용은 쉬워야 한다.
발표 내용을 어떻게 다 외우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발표 내용을 통째로, 그대로 외우는 건 힘들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떤 말을 할지 상기시켜주는 단어 내지 문장만 있으면 된다. 아무것도 띄워두지 않는 연설 같은 경우는 연설문이 있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PPT 발표는 화면을 띄우고 진행한다. 슬라이드 내에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핵심 내용만 적어두면 된다. 그 단어를 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발표 중에 순간적으로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는 본인의 언어로 청중에게 설명하면 된다. 미리 정해놓은 문장을 그대로 외우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어휘를 사용하더라도, 의미 전달만 되면 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본 없이 하는 발표는 발표자가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용을 보고 곧바로 설명할 수 있다. 공부를 해서 암기를 해야 하고, 사전에 발표 연습도 많이 해야 한다. 대본을 읽으며 하는 발표보다 여러모로 준비 과정이 더 길고, 더 많이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그만큼 결과가 좋다.
2. 글자는 최소화, 이미지는 최대화
장난감 조립 설명서를 보며 장난감을 조립할 때, 글자를 읽는 것보다 그림을 보는 것이 더 쉽고 편하다. 발표도 마찬가지다. 글자보단 표, 사진, 차트 등의 이미지를 보는 게 이해하기 더 쉽다. 이미지가 더 단순하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슬라이드에 글자가 빽빽하면 시각적으로 복잡해 보여서 흥미가 떨어지고, 청중이 듣기와 읽기를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집중이 잘 안된다. 게다가 문자는 이해하기 위해 이미지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한눈에 들어오고, 복잡한 해석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미지를 보면서 동시에 설명을 듣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지를 가리키며 그에 대한 해석과 함께 연관된 핵심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제일 이상적이다.
발표가 이해하기 쉬워야 더 집중하기 때문에 글자는 핵심 내용만 적어 넣어 최소화해야 하고, 대신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 발표는 되도록 짧게
발표를 길게 하면 발표자도 지치고, 청중도 지친다. 오랫동안 집중하는 것은 힘든 일이고, 재미없는 내용이면 더 힘들다. 발표를 통해 많은 정보를 주입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체적인 내용과 주요 핵심 단어만이라도 청중의 머릿속에 남는다면, 그건 성공한 발표이다.
대본 없이 말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 주저리주저리 하면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집중도 잘 안된다. 말을 길게 하다 보면 쓸데없는 내용이 많아져서 본질이 흐려진다. 핵심을 이해하고 외우기도 힘든데, 잔챙이들까지 많아지면 생각이 이리저리 휩쓸릴 수 있다. 한 곳만 바라보고 가야 안정적이지, 이 길 저길 헤집고 다니면 정신이 없다.
또한, 대학 내에서든, 직장 내에서든 발표는 시간제한이 걸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하나 설명을 길게 하다 보면 시간에 쫓기게 되고, 핵심을 빼먹거나 잘못 설명하면서 끝낼 수도 있다. 정해진 시간보다 좀 더 짧게 하기로 계획한다면 실전에서 당황할 일은 없다. 여유롭게 발표할수록 내용 전달은 더욱 깔끔해진다.
발표를 예상외로 길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짧게 하는 것이 더 낫다. 마치, 야근하는 것보다 예상보다 일이 금방 끝나서 정시에 퇴근하는 게 기분 좋은 것처럼 말이다. 일(공부)보단 노는 게 더 좋은 법이다.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용기가 필요하다.
몇 년 만에 해보는 발표여서 그런지, 너무 긴장되었다. PPT가 발표 이틀 전에 만들어졌다. 다운로드한 직후부터 발표 내용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PPT에는 이미지는 없고, 글자만 가득했다. 내가 원했던 PPT는 아니었고, 맘대로 수정할 수도 없었다. 내 원칙을 100% 적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이기지 못한다면 평생 외롭고 쓸쓸하게 골방에서 지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용기를 내야 했고, 이겨내야만 했다. 실패란 있어서는 안 됐다.
발표를 하던 날, 종이를 들고나가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나는 빈손으로 나갔다. 대본을 보지 않으니 시선은 화면과 청중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보고 읽는 것이 아닌, 생각하며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니, 낯선 사람과의 1대1 대화처럼 발표가 좀 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앞에 나가 할 말이 별로 없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예상외로 말은 술술 나왔다. 내가 아는 것을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말하니, 발표가 다소 편했다.
긴장하다 보니 다리는 너무 후들후들 떨렸다. 컴퓨터가 있는 단상에 서서 발표를 하긴 했지만, 혹시 떠는 게 보이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목소리가 중간중간 조금씩 떨리기도 했다. 너무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그래서 말이라도 자연스럽게 하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주어진 시간만큼 채우고, 어쩌다 보니 발표를 끝냈다. 뭔 말을 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발표가 흘러갔다. 평소에 낯선 사람들을 마주치며 느꼈던 두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불안이 발표 내내 몰려왔다. 하지만 난 의지력으로 이겨내려고 했다. 일단 단상에 섰으니 마무리는 확실히 지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라고 내가 말한 후, 교수님은 이내 말문을 여셨다.
발표 정말 잘했죠? 박수 한번 쳐주세요~
기분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수 소리가 참 크게 느껴졌다. 오묘하면서도 짜릿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나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을 상대로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내 잠재력은 조금씩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작지만, 나에게는 웅장한 한 발자국이었다.
그 이후로도 내 원칙은 꾸준히 지켜졌다. 발표 횟수가 누적될수록 내 자신감은 올라갔다. 잘했다는 다양한 칭찬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밝아졌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점점 둔해져서 나중에는 크게 두렵지 않게 되었다.조금씩 감정의 감옥의 벽은 얇아지고, 문은 헐거워졌다. 드디어 한줄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