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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모자 Sep 05. 2021

회식자리에서 술이 사라진다면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걸까?

난 '회'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싫어한다. 회사, 회의, 회식... 그중 회식은 생각만 해도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다.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는 초식남인 나로서는 회식자리는 가시방석이다. 왜 앉아있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있을 필요가 있긴 한 건지 아리송하기도 하다. 따라오라고 해서 가는 거고, 앉으라고 해서 앉는 거지 솔직히 개인 자유에 맡긴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참여 안 할 것 같다. 하여튼 나에게 술과 함께하는 회식은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20대 초반에는 술을 어느 정도 먹긴 했었다. 소주 반 병은 마실 정도여서 술자리에서 어느 정도 분위기는 맞춰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느 순간이 되자 술이 몸에 아예 안 맡게 되었다. 한 잔만 들어가더라도 위가 굳는 것처럼 소화가 안 되고, 더부룩해지고, 심할 때는 토할 것 같은 느낌까지도 든다. 위에서 술을 못 받아들이게 돼서 취하기도 전에 술을 못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술을 아예 먹지 않는다. 남들에게 얘기할 때도 술을 아예 못 먹는다고, 체질이 안 맞아서 원래부터 술을 못 먹는다고 말한다. 괜히 한 잔 두 잔 먹으면 엄살 피운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문제는 술을 못 먹는다는 얘기를 하는 게 너무 불편하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앞선다. 술을 못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기는 싫은데, 왠지 못 먹는다고 얘기하면 미움을 살 것만 같아 불안하다. 특히 나이가 많은 분이나, 술을 좋아하는 분과 함께 하게 되면 그 불안은 더욱 강해진다.


대한민국에선 회식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회사생활을 하는 데 있어 회식은 친목을 다지고, 정보를 교류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상사, 동료, 후배와 친하게 지내고, 비공식적인 정보를 빠르게 얻는 것은 승진, 업무 협조 등 많은 방면에서 필요한 일인 게 현실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조직생활에선 인간관계와 눈치가 업무 실력보다 더 비중이 크다. 업무 성과보다는 나랑 친하고, 나한테 복종하는 사람인지를 따져보아 승진을 결정한다. 조금이라도 일을 더 잘해서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보다 내 편인 후배를 더 많이 두는 것을 회사 내에서의 생존과 관련해서 더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업무의 매뉴얼화, 업무 프로세스의 체계화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중요하다. 우리나라 기업들 대부분이 아직 이런 비체계적인 구조라고 생각한다. 일을 주체적으로 하고 싶어도, 참고할 만한 자료 같은 게 부족하고, 직속 상사한테 물어보면 초등학생이냐고 하면서 알아서 하란 식으로 대답이 돌아오는데 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회식에서 술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의 회식 문화이다. 술 없이 저녁을 먹고, 술 없이 볼링 등 취미생활을 즐기면 뭔가 하나 빠진 것처럼 허전하다고 느낀다. 저녁을 뭘로 먹든 술과 함께 먹어야 회식인 것 같고, 노래방을 가든 스포츠를 즐기든 술이 빠지면 시시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술이 빠지면 섭하다는 여론은 나같이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의 탈주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언젠가 TV에서 봤었는데, 서울의 어느 유명 대학병원이었다. 저녁 회식을 유명 호텔 레스토랑에서 뷔페식으로 하고, 1차만 하고 헤어진다는 것을 봤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흔해빠진 삼겹살집, 곱창집이 아닌 호텔 레스토랑이라니. 뷔페식 레스토랑이다 보니 술은 마시고 싶은 사람만 와인이나 맥주 등을 가볍게 마시면 될 것이다. 거기에 1차가 끝이라니. 내가 이상적으로 상상했었던 회식을 실제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었다.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이래서 다들 취업을 서울에서 하나, 이래서 다들 대기업 같이 규모가 크고 남들이 선망하는 회사에 취업하려고 기를 쓰는 건가. 내가 다니는 회사도 여러 취준생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회사이지만, 왠지 씁쓸했다. 저런 회식을 못하는 게 지방에 있는 공공기관이여서 그런 건가.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회사여서 그런 건가 싶어서.


술을 얼마나 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그나마 요즘은 다행이다. 술을 못한다고, 아예 못 마신다고 해도 대부분 억지로 먹이진 않는다. 가끔 술은 배워야 한다고 하거나, 거짓말인지 의심부터 하는 꼰대들도 있긴 하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하면 되는 수준이라 강제로 먹어야 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듯하다. 하지만 심적인 부담은 여전히 존재한다. 술을 못한다고 하면 괜히 나를 싫어할 것 같고, 버릇없다고 속으로 욕할 것 같고, 왠지 사람들과 못 어울릴 것 같은 불안감도 든다. 술을 마시는 사람 사이에 끼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은 조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소외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아무래도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회식자리에서 재미있기 힘들다. 그래서 술냄새가 짙게 나는 대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끼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회식은 부르더라도, 사적인 술자리에는 잘 부르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같이 어울릴 만한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 안 어울리다 보면 친분이 있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주변에 사람이 안 머물게 된다. 술을 안 마셔도 불편하지 않은 자리나 모임이 있으면 충분히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술이 없는 자리를 선호하지 않고, 그런 자리를 잘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특히 남자의 경우에는 더욱 이런 경향이 강하다. 또한 친구나 아는 사람을 만나는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만나자고 할 만한 명분도 상대적으로 적다. 같이 즐길 만한 취미생활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런 게 없다면 만나서 식사하는 것 외에는 같이 할 만한 게 없다. 만날 명분이 적으니, 만나는 횟수도 적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무알코올 주류나, 'RTD 주류'라고 술에 탄산음료나 주스 등을 섞은 저알코올 음료가 인기를 끌고 있다. 2021년 상반기에 롯데마트는 '무알코올 맥주'의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81.3% 늘었다. 그리고 이마트는 RTD(Ready to Drink)주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4% 증가하였다(헤럴드경제, 2021.08.31.). 이런 추세를 통해 앞으로 도수가 낮은 술을 즐기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건강관리에 관한 의식의 수준이 상당히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술 없이 어떻게 재미있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술 없이 어떻게 저녁식사를 허전하지 않게 즐길 수 있을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친목을 쌓기 위해 여러 사람들과 술 없이 어떤 활동을 할지 다양한 문화생활을 창조하고 접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노력들이 초반에는 개인적인 만남에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회식문화 개선까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삼겹살집에서 소주 한잔 걸치는 뻔한 레퍼토리에서 조금 방향을 틀을 때가 되었다.




참고자료: 헤럴드경제(2021.08.31.), "코로나로 확 바뀌었다, 요즘 ‘술과 안주’[식탐]",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16&aid=000188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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