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 반성문 : 팀장에서 두 번 잘리고 나서야 깨달은 것들』 EP.4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온 대학 동기 8명이 있다. 녹록지 않은 세상임에도 서로 질투보다 진심을 주고받는 사이다. 나는 이 모임에서 처음으로 직책을 달았다. 수십 번의 박수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양생아, 축하해! 우리 중에 처음 팀장 달았네."
"성공했네, 양생이."
어느 모임을 가든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칭찬은 계속되었다. 너는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고,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이제 어딜 가든 승승장구할 거라고. 흙수저와 백수저. 숟가락조차 계급이 되는 사회에서, 한 계단 올라선 자랑스러운 친구라고.
사람들은 직책을 맡으면, 승진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이제 팀장은 계급이 아니다. 승진의 결과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업무일 뿐이다.
스타트업에 발을 들이기 전, 2개의 상장사에 다녔다. 유난히 수직적인 조직문화 속에서 일을 배웠다.
1. 모르는 사람이라도 인사를 안 하면 혼이 났다.
2. 오전 9시가 출근이면 8시 30분에는 와야 했다.
3. 새벽 2시까지 회식을 하고, 오전 8시에 왔더니 칭찬을 받았다.
4. 상사의 메시지를 10분 안에 읽지 않으면 혼이 났다.
5. 상사의 기분에 따라 보고 할 타이밍을 결정했다.
6. 오탈자는 죽음이었다.
7. 회식은 필참이었다.
직책과 직급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에게 모든 상사는 <윗사람>, 즉 <권위>를 상징했다. 1부터 7까지 성실히 수행해야 했다.
한편 '이런 상사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나름 90년대생으로서, 속히 말해 MZ로서. '변해가는 시대'의 눈치도 봤다.
가끔 후배들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선배와의 징검다리 역할을 자주 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맡게 될 팀장을 걱정해 본 적은 없다. 솔직히, 오만하게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내 예상보다 시대는 훨씬 더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선배의 권위는 사라집니다.
악기도, 요리도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배울 수 있는 세상. 이제 세월의 권위는 액체와 같이 물러져 버렸다.
‘20년 차 나이테’를 관록의 증거로 들이대는 관리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나만의 경험을 쌓아왔다’라는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혜의 원료는 네트워크상에 있기에 딱딱한 권위의 액상화는 점점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앞으로 선배라는 말조차 사라질지 모릅니다.
선배라는 한자에 포함되어 있는 ‘앞서 경험한 사람’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우리는 모두는 변화 앞에서 동등한 신인이 될 터입니다.
탁월한 사람은 그렇게 매일 자신을 선배의 자리, 권위자의 자리가 아니라
‘신인의 자리’에 세우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송길영, 핵개인의 시대≫
이제 누구나 신인이 된다. 이를 몸소 체감한 배우, <추자현>은 후배의 실력과 태도를 보고 자극을 받는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신인 후배들 보면 너무 놀라운 게요. 저희 때는, 길거리 캐스팅돼서 바로 데뷔했거든요.
국어책 읽는다는 말이 연기할 때 있었어요.
요즘은 신인분들이 너무 준비가 잘 되어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트레이닝 되어서 나오니까, 신인들도 신인 같지 않은 느낌이에요.
사실은 신인들 보면 기죽죠. 긴장감 줄 수 있는 후배들이 너무 많으니까.
작품 보면, "어떻게 저렇게 연기하지?" 저도 너무 각성하고 있고.
저는 더 연기를 공부해야죠. 선배님들을 보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후배님들을 보고 공부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50대, 60대, 70대 선배님들을 보고 배울 게 당연히 많지만 그분들이 걸어온 40대는 저와 다르니까.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서 배우는 것 같아요.
'라떼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어린 친구들이 계획하고
앞을 향해 나가는 모습이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해요.
시대에 맞춰서 트렌디함을 배우려고 해요.
≪추자현, 퇴근길 인터뷰 중 발췌≫
자문해 본다. 나 역시 권위를 내세웠을까?
양생이님과 함께하는 팀원들이 답답함을 느낍니다.
보직 해임 당시 들었던 평가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김과장님 처럼 소리를 지르며 혼을 낸 것도 아니고,
박과장님 처럼 짬처리 마냥 행정 업무를 시킨 것도 아니고,
최상무님 처럼 억지로 회식을 끌고 간 적도 없는데.
무엇보다 팀원들이 나에게 솔직히 먼저 건의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상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받은 상처에 '나의 권위'가 존재했다는 생각이 든다. ≪핵개인의 시대≫에서는, '서로 솔직하게 약한 부분을 공유해야 (사람 간의) 관계가 생긴다'라고 말한다. 팀원에게 나의 약한 부분을 솔직히 고백한 적이 있었던가? 추자현 님처럼, "어떻게 저렇게 연기하지?" 감탄하고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던가?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약한 부분’을 공유해야 ‘관계’가 생기는데
그 연습의 장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약점을 노출하면 무시당하고 손해 보았던 상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중략)
지금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가치는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입니다.
나이를 기반으로 선을 긋고 구분 짓기를 반복한다면
각자가 서 있는 삶의 토대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송길영, 핵개인의 시대≫
당시 나는 팀원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했다. 흔한 미디어의 리더들처럼 호연지기(浩然之氣) 같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1. 내 속에 있는 기운으로 바깥에서 가져올 수 없는 것
2. 어떠한 의도에 물들지 않은 정정당당한 기운
3. 정신적 바름(義)과 형식적 바름(道)이 짝을 이루는 것
나는 호연지기를 그릇된 방식으로 표출했다. 팀장 기간, 내가 뱉은 말을 전부 녹음한 후 네이버 클로바에 옮긴다면 2가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올 것이다. '성공' 그리고 '성과'
"A팀원님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B팀원님이 성과를 내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회사는 직원에게 기본적으로 성과를 원한다. 팀원이 회사로부터 인정받게 하고 싶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팀장의 의무 0순위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팀원들은 나를 '회사를 대신해서 말하는 스피커'라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어느 날 B팀원이 일을 할 때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고민이라고 했다. 우리는 한적한 소파에 앉아 자주 대화를 나눴다. 골똘히 생각해 봤다. B가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무엇일까?
"함께 *유니콘 기업을 만들면 B님의 성공 경험이 돼요. 저는 이 경험을 기대하고 입사했고, 타운홀 미팅에서 이 비전을 들을 때마다 떨리기도 해요."
당시 회사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미 유니콘 기업을 만들어본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도 했다. 나 역시 이 로켓에 올라타기 위해 합류했다. B팀원에게도 득이 될 경험이었다.
"이 회사는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B님께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가지고 계신 스톡옵션 가치도 엄청 뛸 거고요."
"..."
"음...공감이 되지 않는 지점이 있나요?"
그러나 한참을 듣던 B팀원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양생이님. 솔직히 저는 유니콘 기업을 들어도 가슴이 떨리지 않아요."
서양의 개인주의가 인간다움, 인본주의의 연장선에서 발현되었다면,
한국의 개인주의는 권위주의의 반대 역학으로 돌출되었습니다.
(중략)
따라서 젊은 층은 자신들의 '번영'과 '생명력'을 제한하는 그 모든 것을 ‘권위적’이라고 느낍니다.
앞으로의 핵개인은 ‘권위적이다’라는 말 자체를 더욱 혐오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송길영, 핵개인의 시대≫
회사. 누군가는 사람이 그리워 다니고,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다니고, 누군가는 밥이 맛있어서 다닌다. 회사와 팀장의 '번영'은 '성공'일수 있으나, 팀원의 '생명력'은 아닐 수 있다.
만약, 팀원의 '번영'과 '생명력'을 살리는 일이 <나의 의무>였다면, 나는 의무를 져버린 팀장일 테다.
80-90년대생 팀장들은 <미정산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속히 말해 <꼬인 군번>이다.
앞으로는 다 돌려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다 돌려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세대가 나올 것입니다.
이들을 ‘미정산 세대’라 부르고자 합니다.
이전에 내가 넣은 ‘상호부조의 시스템’이 와해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내가 부은 적금의 은행이 파산하고 내 적금이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진 것처럼,
내가 이 사회의 기여했다고 믿었던 것들의 토대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이연 된 보상 시스템’의 말단에 놓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른은 아이를 돌보고 다시 아이는 자라 청년이 되어 어른을 돌보는 시스템이 와해된 것처럼
L부장을 L대리가 돕고 다시 L대리가 L부장이 되어 M대리를 찾는 시스템은
이제 여기서 종료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 조직은 부장만 있고 신입사원이 없습니다.
군대 용어대로라면 신병은 없고 병장만 있는 속칭 ‘꼬인 군번’으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송길영, 핵개인의 시대≫
사실, <꼬인 군번>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다. 일평생 '부모 봉양'과 '자식 교육'에 투자하고, 정작 ‘본인 노후’는 대비하지 못한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님이 한차례 겪은 현실이다.
'미정산'에 쿨해지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나 역시 '권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 속에 잔재가 남아있었듯이. 우리 아빠도, 우리 엄마도 매일 모순을 말하고 있다.
"나는 너한테 일절 바라는 거 없다."
어제는 이렇게 얘기해놓고,
"미영이네 집 아들은 이번에 유럽 여행 보내줬다고 하더라."
"...그래서?"
"아니, 그냥 그렇다고..."
오늘은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팀장은 승진의 결과가 아니다. 팀을 우선시하는 '집단주의'는 시대를 역행하고 있고, 팀원 각각을 존중하는 '개인주의'는 더 뚜렷해지고 있다. 회사와 개인, 모두가 승리하는 모순의 줄다리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경질로 우울했던 나에게 선배가 해준 말이 기억난다.
"팀장을 맡았다가, 다시 내려놓는 거. 요즘 스타트업은 흔한 일이야. 크게 의미 두지 마."
이 줄다리기에 실패하면, 직책은 언제든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다.
*유니콘 기업 :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1조 원) 이상이고 창업한 지 10년 이하인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