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시간 23
초2 막내는 가족 대화 시간이 되면 자신의 듣는 마음 컵을 뒤집어 놓습니다. 바른 태도로 듣자고 하면 대답은 잘하는데 이 시간만 되면 엎어 놓은 컵으로 변신을 합니다. 막내가 언제쯤 '듣는 마음'을 품고 대화를 할 수 있을지 아득해 보이기만 해요.
막내는 대화할 때 딴짓은 기본, 식탁 앞에 있는 물건이 있으면 가만 두지 않아요. 대화 중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말하고 있는 가족을 바라보지도 않네요. 심하다 싶으면 한두 번 주의를 주지만 이것도 반복되면 행복한 대화는 물건너갑니다. 분위기가 싸해지고 잔소리 대잔치로 변해버려요.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표정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무너집니다. 아이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되뇝니다. 어쨌든 가족 대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아이 행동에 흔들리지 않으려 해요.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되겠죠? 하루는 가랑비에 옷 젖는 전략을 꺼내 들었습니다. 저와 아이의 컨디션이 괜찮을 때 '듣는 마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막내와 너프건(장난감 총의 한 종류) 놀이를 재밌게 한 후였습니다. 서로가 기분 좋은 상태라는 걸 확인한 후 작전을 펼쳤습니다. '때는 이때다!' 하면서 일단 아이에게 먹히든 먹히지 않든, 아빠의 듣는 마음 실험을 하였습니다. 어떻게든 아이의 눈높이에서 듣는 마음을 설명해 보려고 한 것이죠. 어른들이 보기에는 뻔하지만 초2의 순수한 마음을 믿었습니다. 어설프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도 용기를 내었습니다. 식탁에 쟁반과 물통과 컵을 준비한 후, 막내를 불렀습니다. 막내가 보는 앞에서 쟁반 위에 컵을 뒤집었습니다. 그 위에서 실감나게 모션을 취하며 물을 부었죠.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어요. 쟁반이 넓어야 물이 넘치지 않아요.
아빠 : 자, 이거 봐 봐.
막내 : 뭔데?
아빠 : (물통을 찰랑찰랑 흔들며) 아빠가 컵에 물을 부울 거야. 물이 단 한 방울도 컵에 안 들어가게 할 수 있어. (뒤집어진 컵에 실감나게 물을 붓습니다)
막내 : 에잇, 뭐야!
아빠 : 신기하지 않아? (컵 속을 보여주며) 물이 한 방물도 안 들어갔잖아.
막내 : 뭐가 신기해? 당연한 거지. 그런 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막내가 자기도 해 보겠다며 물통을 빼앗아 막 들이부으려고 해서 말렸습니다. 막내가 하면 물바다가 될 것 같았았습니다.
아빠 : 어떻게 해서 컵에 물이 한 방울도 안 담겼지?
막내 : (컵을) 뒤집었으니까 물이 안 들어가지.
아빠 : 그러면 컵을 바르게 세워 놓고도 물이 안 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
막내 : 반찬 뚜껑으로 막으면 돼.
아빠 : 오! 좋은 생각이야. 그럼 진짜 물이 안 들어가는지 한 번 해 볼까?
막내 : 해 보나 마나야. 아까와 똑같아.
아빠 : 아까와 어떤 점이 같은데?
막내 : 물이 안 들가는 거. 아빠는 컵을 뒤집었고, 나는 뚜껑으로 막았어.
아빠 : 컵을 뒤엎거나 뚜껑으로 막으면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없는 거네. 그치?
막내 : 응.
이 정도 대화면 아이 마음에 충분히 밑그림이 그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디딤돌을 놓은 것이죠. 원래는 컵이 뒤집히면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없다는 것만 확인하려 했는데, 갑자기 컵을 바르게 세워놓였을 때 물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질문이 생겼습니다. 반찬 뚜껑으로 덮으면 된다는 생각이 당연했지만 재밌었습니다.
아빠 : 지금 아빠가 말하는 소리 들리지? 만약에 아빠가 물병이고, 아빠한테서 나오는 말소리가 물이라고 생각해 봐. 그것을 담는 컵은 뭘 것 같아?
막내 : 아빠가 물병, 아빠 목소리가 물... 컵은? 음... 나인 것 같은데...
아빠 :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되어 기쁘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맞아! 맞아! 아무리 아빠가 많이 말해도, 아빠의 말소리가 은율이한테 못 들어가게 할 수 있지?
막내 : 응, 컵을 뒤집는 것처럼 하면 돼.
아빠 : 좋아. 그 컵을 아빠는 은율이 마음의 컵이라 불러도 될까? 우리가 대화할 때 마음의 컵을 뒤집는 건 어떤 모습일까?
막내 : (이쯤에선 은율이가 아빠의 마음을 읽었네요. 씨익 웃으면서) 안 듣고 장난치는 거지 뭐...
아빠 : 아빠는 우리가 대화할 때 은율이가 마음의 컵을 바르게 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아빠 목소리, 엄마 목소리, 누나 목소리 모두 모두 잘 담을 수 있잖아.
여기까지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 마지막 막내의 대답이 "아빠, 좋아. 오늘부터는 내 마음의 컵을 바르게 할게. 아빠 소리 잘 담을 수 있게 말이야." 했으면 훈훈했을 텐데, 제 욕심이 과했는지 "싫어. 계속 내 컵을 엎어놓을 거야. 그게 재밌잖아." 하면서 끝났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과정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아 끝냈습니다. 제 기대와 다르게 결말이 났지만 여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목적을 괜찮게 달성했다고 보아요. 막내가 '듣는 마음'을 향해 어디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1cm 정도는 가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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