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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현승 Oct 20. 2021

아무도 듣지 않는, 가족의 하루 일상

가족의 시간 21

2년 전 어느 날,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라는 질문이 저희 가정에 찾아왔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늘 곁에 머물러 있었어요. 자주 묻지 않았을 뿐이죠. 가끔씩 질문을 받는 사람은 엄마 아빠보다는 아이들이었고, 대답해도 몇 마디 말이 전부였습니다. 두 해 전부터는 정기적으로 가족 대화 자리에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자신만 아는 숨겨진 오늘 일상을 꺼내보자고 한 것이죠.


가족들은 처음 질문을 듣고 "이건 뭐지? 내가 왜? 기억이 나질 않아. 별 것 없다고." 하며 귀찮아했습니다. 대답 내용을 비추어 볼 때 말투가 어떨지 짐작이 가시죠? 뻔한 걸 왜 질문하냐는 듯 짜증이 섞여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는 홀대를 받으며 저희 가족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한편 짜증 내는 아이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이들의 하루 일상은 매일 반복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롭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무엇이었죠. 반면 아이들이 생각하는 말할 거리는 평범하지 않은 것, 문제가 있는 사건, 누군가와 심하게 싸운 것,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하지 않는 일상을 왜 굳이 말해야 하냐는 거죠. 


아이들의 상황과 불평이 이해가 되면서도 가족 일상에 관심 갖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문화가 불편했습니다. 저는 새로울 것 없는 '오늘 하루'가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어서 특별했거든요. 하루 일상을 말하는 시간을 낯설게 느끼던 그때,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가족의 일상을 듣지 않아도 괜찮아 문화를 거슬러 보자고 한 것이죠. 


대화 좀 하자고 하면 막내조차 자동반사적으로 할 일이 있다는 말부터 꺼냈습니다. 다들 바쁘다고 했지만 무엇을 하느라 그런지 살폈습니다. 집에서 가족들이 스마트폰 카톡, 유튜브, 티브이 앞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가질 때는 단 한 번도 아깝다거나 빨리 끝내자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냐며 아쉬워했습니다. 서로의 일상을 묻지 않고 듣지 않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게임과 유튜브, 영상 미디어를 만나지 않고 지나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이 당연했고 가족들과 연결되는 시간을 갖자고 하면 반발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집에 들어온 가족이 잠시 스마트폰을 쉬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지내다가 다시 만났잖아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개인의 시간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틈새를 만들어 가족의 시간으로 모여 보았습니다. 서로가 어떻게 지냈는지, 숨겨진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가족이 되면 어떨까 했습니다. 


엄마 아빠는 직장과 사업장에서,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람들을 만납니다. 일터와 학교에서 일하고 배웁니다. 때가 되면 점심도 먹고 잠시 쉬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점심 메뉴는 무엇이고 급식은 맛있었는지, 수업에서 생각한 것은 무엇이고 쉬는 시간과 점심때 친구들과 뭘 하며 놀았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엄마, 아빠도 일터에서 겪은 이야기를 자녀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각자의 삶에는 이렇게 나눌 만한 사연이 많습니다. 그 안에 행복하고 기쁘고 속상하고 답답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 이 질문은 지나간 과거의 일상과 감정을 끌어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만약 뭘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자기 관심사나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됩니다. 자주 하는 게임이나 요즘 읽는 책 이야기도 좋습니다. 나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였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돌아보는 순간, 경험한 사건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납니다. 물론 모든 일정을 순서대로 늘어놓는 건 아녜요. 가족이 함께 식탁에 마주하여 스쳐간 하루 일상을 가볍게 돌아보면 됩니다. 얼마 전에는 유도를 처음 배운 아들과 딸이 다녀온 이야기를 나눠주었습니다.


초2 아들 : 오늘 유도장 처음 갔는데, 첫날부터 기술 배웠어. 한번 보여줄게. 누나 좀 나와서 나 붙잡아 줄래?

초6 딸: 살살 좀 해. (동생이 업어치기를 흉내 내자) 여기서 날 넘기려 하면 어떡해?

동생 : 누나가 무거워서 못 넘겨.

아빠 : (방금 아이들이 사과를 먹다가 시범을 보이는 것이 걱정되어) 얘들아, 먼저 입 속에 있는 사과 다 먹고 하면 어때?

엄마 : 학원에서는 그렇게 업어치기로 친구를 넘긴 거야?

아들 : 아니, 오늘 처음 배운 건데...

아빠 : (동생이 누나를 업어치기 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 오! 안 돼. 확 넘기면 누나 다쳐.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겠어.

아들 : 누나가 나보다 키가 커서 절대 넘겨지지 않아.

딸 : 맞아, 아무리 날 넘기려 해도 키가 맞아야 가능해. 해 봐. 해 봐.

아들 : 유도장에서 어떤 동생과 대결했어. 관장님이 잘했다고 했어.

딸 : 걔는 너보다 한 살 나이 많아. 형이야.

아들 : 나보다 키가 작았는데...

엄마 : 어떻게 대결했는데?

아들 : 형이 먼저 나한테 기술 쓰려고 했는데 내가 형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어. 그런데 나도 형 다리에 걸려 함께 넘어지면서 다쳤어. 난 흰띠인데, 그 형아는 밤띠였어. 

 

유도 학원에서 어떤 형을 넘어뜨려서 기분이 좋았다는 얘기였습니다. 평소에 볼 수 없는 풍경이었는데 이날 기분이 좋았는지 누나는 기꺼이 동생의 시범 파트너가 되어 주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래? 정말? 우와!' 하며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는 것처럼 놀라면서 끝까지 들었습니다. 가족의 오늘 하루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사실 가족이 아니라면 '아, 그랬구나' 하는 정도로 끝날 얘기가 대부분이죠. 가족이기에 다르게 보이는 것뿐이에요. 저는 아이의 눈빛과 목소리와 이야기가 오징어 게임보다 더 재밌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반응을 어이없어 하지만 저는 그런 마음으로 가족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오늘도 “하루 어떻게 지냈어?” 이 질문으로 서로의 일상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별 다른 프로그램 없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가족이 거실 식탁에 둘러앉으면 준비가 된 것입니다. 질문 하나가 어떻게 가족의 일상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를 물으며 숨겨진 보물을 건져 올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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