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몇 살 시절, 친구의 농담처럼 우리가 피아노를 일찍 그만두지 않았으면 피아니스트가 되었을까. 우리가 그만 배우기로 결정한 수많은 것들이 결국 지금 우리의 모습이라면 나는 피아노 연주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게 나의 음악 인생을 노래할 수 있다. 엄마 죄송해요, 피아노 학원에서 내가 배운 건 쫄쫄이를 난로에 어떻게 구워야 제일 맛있나였어요. 피아노가 우리집에서 팔려나가던 날, 나는 저녁으로 피자나 치킨 정도는 먹겠다고 기대했죠. 도시라솔파미레도, 4년을 배우고 그만두었지만 서른 중반이 넘은 지금도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있어요. 하지만 내 딸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죠, 랄라.
나는 딸아이 입에서 제발 피아노 좀 배우고 싶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다가 피아노 레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여기는 한국처럼 아이가 매일 피아노 학원에 가서 배우는 게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개인교습을 받는 게 일반적이라 아이의 피아노 연습이 오롯이 내 몫이 될테니까 그랬다. 왠만하면 아이에게 큰소리 칠 일은 피하고 싶은데 열심히 배우지도 않은 피아노를 내가 아직도 칠 수 있다는 사실에 역시 뭘 배우려면 어릴 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고. 그래서 딸아이가 만나게 된 피아노 선생님은 딸아이가 피아노를 잘 칠 수 있게 되면 아이를 엄청 혼내면서 가르치실 것 같다. 결과물이 아름다워도 그 과정까지 우아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선생님에게 아이가 지적받으면 내가 더 안절부절한다.
피아노 건반 위에 개구리 발가락처럼 쫙 펼쳐진 딸아이의 손가락은 귀엽지만 충격적이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의 서툰 맨 처음은 요즘 부쩍 다 큰 애 같던 딸아이를 다시 아기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딸아이는 평생 나의 아기로 살겠구나 싶다가 내가 저렇게 자랐구나 하다가 아 진짜 자식이 뭔지, 사는 게 뭔지. 첫 레슨을 받은 다음날 아이는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피아노 연습을 했다. 이것이 바로 피아니스트의 어린 시절인가 나는 걱정하면서 들떴는데 딸아이는 지금 피아노 레슨 횟수가 늘어날수록 스스로 피아노 앞에 앉는 날이 줄어드는 정상궤도에 들어서있다.
둘째는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을 밑거름으로 잔재주만 늘려가고 있다. 딸아이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 동안 피아노에 손을 델 수 없는 둘째가 피아노 선생님이 떠난 뒤에 펼치는 광기 어린 피아노 연주는 그래서 나의 심금을 울린다. 둘째가 딸아이처럼 손가락을 건반 위에 펼쳐놓지 않길래 자세히 살펴보니 아이의 손가락이 짧아서 그런 것일 뿐 아이가 피아니스트의 손을 가진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피아니스트처럼 피아노를 연주하길 바라면서 피아노 전공은 안된다고 눈빛으로 말해요. 이것저것 잘 하는 게 많아지면 행복한 순간도 많아질거라 나를 매일 설득하고 블라블라 그래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네가 건강하고 즐거우면 되지! 엄마가 진짜 많이 화났어요. 나는 커서 온 세계에 개미 친구를 둔 베짱이가 될 건데 엄마가 알면 안되니까 오늘도 피아노를 쳐요 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