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속옷을 사달라고 했다. 스포츠 브라.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기만 하는 입장에서 소아과 의사에게 전화라도 한 통 걸어봐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변화를 겪는 당사자일 때와 변화의 목격자일 때, 뭐 둘 다 별로 좋아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어떤 변화의 당사자인 채로 살아가는 편이 더 마음 편한 일 같다. 아이가 자신의 변화를 즐거워하며 나에게 이야기하면 도망가고 싶거나, 짓궂게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노브라는 여성 해방을 의미해,라고 대학 다닐 때 어떤 언니가 말했다. 언니 왜 속옷 안 입었어?, 노브라는 여성 해방을 의미해. 그때 나는 결코 여성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딸아이에게 노브라는 여성 해방을 의미한다며 속옷을 사주지 않으면 진짜 웃기고 멋있는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맨몸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딸아이의 눈빛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딸아이에게 여성은 구속이 아니라 장래희망인 듯해 보여서.
가끔 친정 엄마가 속옷을 사서 부쳐준다. 내 몸에 맞지 않는 큰 사이즈로. 나는 한 번도 이렇게 몸집이 컸던 적이 없는데 엄마는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사는 시간 동안 내가 자란다고 생각하나 보다.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서로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겠지만 멀리 있으면 그런 오해를 바로잡을 타이밍이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말했다. 가장 작은 사이즈를 사야 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커다란 속옷이 작은 것들 속에 섞여 들어있다.
어느 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성장을 자랑하는 딸아이에게 네가 노력해서 커지는 게 아니잖아, 해서 아이를 기분 나쁘게 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이의 그런 해맑은 모습이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나의 열등감, 자격지심을 자극하는 거였다. 아이가 나보다 커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내가 되고 싶던 엄마는 아이보다 몸이 크고, 마음도 크고 아이의 인생보다도 더 큰 존재였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엄마, 노브라는 여성 해방을 의미해. 그래, 이제 그걸 알았으면 더 이상 엄마를 찾지 마.
준혜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