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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Apr 16. 2023

안녕하세요, 달리기입니다.

달리기는 어쩌면 달리기 전부터 달리기를 마칠 때까지 몸과 마음의 부조화를 연료 삼아 지속하는 행위 예술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베이글 반쪽, 바나나 반쪽과 커피를 섭취, 한밤중과 다름없이 깜깜한 그 새벽에 집을 나서, 차로 한 시간을 달린 후 주차, 주차장에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출발 지점에 도착하면서 겪는, 끊임없이 연결된 이동의 신체적 피로와 그에 반해 점점 고양되기만 할 뿐인 정신의 관계를 나에게, 셔틀버스를 가득 채운 다른 러너들의 존재를 서로에게, 뭐 굳이 이해시킬 필요는 없겠네요.


내가 가본 모든 마라톤 대회에서는 출발하기 전에 미국 국가를 쩌렁쩌렁 컴퓨터로 틀거나,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서서 부르곤 했다. 그때마다 익숙한 멜로디 속에 오래된 이방인으로 국민, 주권, 국가의 구체성을 그 자리에 모인 사람수나 그들의 생김새로 엿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애국가의 비장함을 속으로 되새겨볼 뿐. 그리고 미국의 노래 절정에서 태연한 얼굴로 소리 없이 외쳐보는 대한 사람 대한으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안녕하세요, 달리기입니다. , 달리기 전에는 스트레칭입니다.

 

2시간 안에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려면 1시간 50분 페이서를 쫓아가다 점점 뒤처지면 되겠지, 하는 이 알량한 계산으로 나는 레이스 시작 후 10분간 오버페이스로 달렸다. 아예 달리기를 포기하고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속도를 줄이자,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내 뒤에서 물 밀듯이 우르르 밀려와 나를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혹시 내가 지금 미쳐 거꾸로 뛰고 있는 건 아닌지 어지러웠다. 이유 모를 두려움에 차마 뒤돌아 볼 수도 없어, 다만 나의 느려지는 속도가 홍해를 가르듯 피니쉬라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무리를 가르고 있는 중이라고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다 2시간 페이서를 만났고, 그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사이 내 눈앞에서 자꾸, 자꾸만 사라져 갔다.


아침 바닷가의 서늘한 안개와 달리기로 데워지는 체온의 차이는 뿌연 안경알로 확인 할 수 있다. 이러면 무엇을 견딜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아니, 사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더 나아질 것인지는 본능적으로 안다. 안경을 쓰나 벗으나 보이는 것은 모두 안개와 그림자뿐이라면 몸에서 안경을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눈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발휘할 나의 다른 모든 감각들의 열심은 내 곁의 아름다운 풍경에 무심할 리가 없다.


포기와 완주를 동시에 바라며 달리기는 딱 40분까지였다. 그쯤 되면 포기조차 애써 이루어야 할 무언가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편안히 끝까지 달릴 수 있는 페이스에 안착해 정신 차려보니 피니쉬라인 밖에 서서 숨차게 물을 마시고 있었다. 안녕히 세요, 달리기. 다음에 또 만나요.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은 달리기의 또 다른 묘미 중에 하나는  끝나고 나면 저절로 스스로에게 다음을 기약한다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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