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화이트보드 앞으로 한 여성이 홀로 선다. 그와 얼마간 거릴 두고 디귿자로 교실 벽을 두른 책상들 가운데 왼쪽 모서리에 놓인 책상 의자에 앉아 어깨까지 내려오는 저 갈색 곱슬머리 광택은 윤기일까 물기일까를 궁금해하는 사이, 오랜 경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가 천천히 발음한다. 저마다 다 다른 이유로 영어를 배우러 이 자리에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선생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애써 찾아 앉은 구석 자리는 자연스럽게 수업 과정의 시작과 끝이 되고. 우리 모두 자기소개를 해볼까요? 자, 저기부터. 거기 있던 나는 한국 사람, 내 옆으로 브라질 사람, 중국 사람, 타이완 사람, 중국 사람, 러시아 사람, 중국 사람, 베트남 사람, 우크라이나 사람, 아이티 사람, 한국 사람. 적당한 순간 가볍게 서로 눈을 맞추며 목례를 나눈 두 한국인끼리는 선생님 옆모습을 사이에 둔 채 멀찍이 마주 앉아 수업을 듣는다.
여러분, 저처럼 영어 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마세요. 교실 안에 모인 학생들 대부분은 미국에서 살게 된 지 5년이 넘지 않은 어른이다. 지금 이 시점 당신 영어에서 모국어 억양을 모조리 다 지우기는 이제 불가능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되는 거잖아요. 이 수업의 목표는 여러분이 영어를 이해하고, 영어로 이해받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느샌가 To understand and to be understood를 반복해서 주문처럼 외친다.
나를 경계로 안팎의 언어가 다른 나라에서 살기시작한 순간부터 스스로 이해할 말과 타인에게 이해받을 말 사이, 그 어색한 시차를 바로 잡지 않았다. 서투른 외국어에 무한히 빚진 사람처럼 굽신대는 마음으로 재빠르게 대답을 해버리거나, 침묵하기를일삼아온 것이다. 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곤란해하시는 듯한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 또 이렇게 조용히 앉아 있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게 될 텐데. 역시 예전처럼 숙제와 시험만이 나의 희망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