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금니 신경 치료를 받기 위해 들어간 아늑한 치과 로비엔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간호사가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고 할머니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들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는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는다, 할아버지에게 뭐라 몇 마디 건넨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모습에 일주일 가까이 견뎌온 치통을 이제 더는 참지 못하겠어 조바심이 난다.
오늘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넌 신경 치료 전문의를 보러 가야 돼. 일반 치과 의사가 내 오른쪽 머리맡에 앉은 채 날 내려다보며 뿌린 말. 그 순간 난 아무 대꾸도 하기 싫고. 내 왼쪽 머리맡에 서 있던 간호사가 내가 오늘 예약 잡아 줄 수도 있어. 오, 고맙습니다. 이건 썩은 이만 들여다보는 자와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신경 쓰이는 자의 차이일까. 어쩌면 한 신체의 무탈함은 여러 사람의 눈과 마음을 통과해야 겨우 가닿을 수 있는, 그나마도 일시적인 상태일지도.
할머니가 진료실 밖으로 나오기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걸린다. 타이레놀도 소용없는 치통을 마치 출산에 임박한 진통처럼 온 신경을 다 기울여 앓아 그 시간을 전부 보낸 뒤 진료 의자에 누워 마주한 나의 구세주가 한 손에 마취 주사를 들고 묻는다. 너 어디 살아, 거기 얼마나 살았어, 그전엔 어디 살았어. 아니, 제발 이 고통을 당장 멈추어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대답하진 못하고 그동안 내가 살아본 동네 이름을 줄줄 시인한다. 그런데 너 원래는 어디서 왔어? 한국, 한국! 처음부터 이렇게 묻고 대답했으면 마취 주사를 더 일찍 맞을 수 있었을 텐데.
치통이 모조리 사라진 내 몸과 마음이 한가해 또 다른 괴로움을 찾아 헤맬 기미가 엿보여. 그리하여 되새겨보는 노부부의 구경거리 되지 않는 단란함과 침묵 같은 느림. 우리도 그럴 수 있나, 운이 좋다면. 우리에겐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은 거지, 한평생과도 같은 이, 단 하루. 그래, 난 한국에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