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사흘간 중간고사를 치른 중학생에게 시험에 대한 얘길 굳이 먼저 꺼내진 않는다. 그래봤자 내게 돌아올 대답이란 청소년 특유의 무례와 신경질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사랑해 마지않은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오직, 부주의하기만 한 나를 이 정도로나마 겸손하고 억울하게 만드는 자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무려나, 저는 가끔 무관심을 가장한 호기심 넘치는 침묵으로 당신 동의 없이 먼저 시작해 버린 이 사랑과 인연에 책임을 다할 따름인 거죠.
태권도장에 다 도착했는데도 선뜻 차에서 내리지 않는 중학생이 수상해. 어느 순간 그 분위기를 더욱 가라앉히며 차 안을 가득 채우는 물에 젖은 목소리. 여태까지 본 수학 시험 중에 이번 점수가 제일 낮아. 낮에 양호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애가 머리가 아프다는데 두통약을 줘도 되겠느냐는 전화의 원인이 이렇게 질문 없이 밝혀지고. 수업 시간에 배운 건데도? 안 배운 거야. 선생님 미친 거 아니야? 33점 맞았어? 낄낄, 아니. 내 고등학교 수 2 시험 점수의 쓸모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중학생이 태권도장으로 들어간 뒤 나는 점점 추워지는 차 안에서 인터넷을 쉴 새 없이 뒤지면서 학원이 나을까, 과외가 낫나, 고민하다 포기한다.
집으로 돌아와 도복을 사복으로 갈아입은 중학생과 다시 차를 타고 나가 약국에 간다. 중학생이 뜬금없이 매니큐어를 사달라길래, 네 돈 주고 사. 아세톤 한 병과 짙은 파랑, 검정, 은 반짝이, 분홍 금속 빛깔의 매니큐어 네 병을 집어든다. 그 후로 새벽 한 시까지 거실에서 중학생은 매니큐어를 발랐다 지웠다 온 집안에 유독한 냄새를 풍기며 스스로를 돌보는데. 저는 중학생의 수그린 그 뒷모습을 희망적으로 여깁니다. 저렇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하고 싶어서 스트레스 받으니까 앞으로 공부하라 마라 잔소리할 일이 제겐 아무래도 없을 것 같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