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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Sep 08. 2023

한 조각 빛을 가진 사람처럼

두번째 편지, 기억에 대해서

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은 재택근무를 했어. 사실 요즘 매일매일 집에서 일하고 있어. 하루걸러 하루 집에서 일하다가, 이제 일주일에 하루를 제외하고는 재택근무를 하게 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 남들은 부럽다고 말하지만 나는 재택근무에 적응하기 어려웠어, 지금도 노력 중이고 말이야. 출퇴근 스트레스나 사무실에서 겪는 자잘한 나쁜 일들을 피할 수 있는 게 처음에는 마냥 좋았어. 하지만 그것에 기뻐하는 것도 하루 이틀. 곧 고립감이 몰려왔어. 층고가 낮고 해가 잘 들지 않는 방에 종일 형광등을 켜놓고 있는 게 가끔 기절할 만큼 끔찍하기도 했고 말이야. 다행스럽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아졌어. 층고가 넉넉하고, 해와 바람이 잘 드는 창을 가진 방으로 이사를 왔거든. 그리고 요령이 조금 생겨서, 아침 근무 전에 잠깐 동네를 둘러 걷거나, 점심시간에 피아노를 치고 오기도 해. 그리고 근무 시간이 끝나면 사람들의 소리가 있는 곳을 찾아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동네의 작은 공원이야. 놀이터가 있는 공원이라서 아이들이 달리며 내는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 수다를 떠는 보호자들의 목소리도 좋아해. 그리고 카페에 가기도 하지. 오늘은 카페에 왔어. 통유리 창으로 바깥이 잘 보이는 곳이야. 언제나 앉는 창가 자리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자두 향이 섞인 루이보스티를 주문했는데 컵에 든 것이 자꾸 맥주로 보여(웃음). 지금 술을 마시고 싶은 건 아닌데 맥주가 떠오른 이유는 듣고 있는 노래 때문이야.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춤’이라는 노래야. 낮술을 하고, 이 노래를 들으며 제주 시골집에 딸린 작은 옥상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던 때가 있어. 그런 날들이 무수하게 이어지던 시기가 나에게 있었어.


아마 2017년 봄이었을 거야. 내가 휴학하고 제주살이를 하러 떠났던 게. 돈은 없는데 여행을 길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여행했지. 그곳에서의 일상은 단순했어. 새벽 6시쯤 일어나서 부엌에 달걀과 식빵, 잼과 우유를 꺼내 두고 다시 10시까지 잠을 잤어. 게스트들이 퇴실을 하고 나면 두 시간 남짓 청소를 하고 점심을 먹었어. 입실 시간인 4시 전까지는 동네를 둘러 걷거나 하릴없이 멍을 때리기도 하고 빨래도 했어. 4시부터는 게스트들을 맞이하고, 저녁 겸 파티 준비를 시작하지. 그리고 7시부터 10시까지는 게스트들과 두런두런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고기와 문어, 김치찌개 같은 걸 나누어 먹었어. 그때도 이렇게 낭창하게 매일을 보낼 일이 앞으로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더 충실했어.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웃고 눈을 마주했어. 많은 사람이 하나의 계절처럼 또렷하게 다가왔어. 많은 계절을 보았지만, 그중에서 내가 산 계절은 딱 한 명의 것뿐이었어. 그 사람은 나와 함께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했던 언니였어.


언니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았어. 일곱 살이 그리 큰 차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때의 일곱은 이십 대 초반과 이십 대 후반의 것이었으므로 티가 날 수밖에 없었지. 언니와 나는 나이뿐 아니라 성격이나 취향 같은 내면의 모습도 참 다른 사람이었어. 어떤 사람도 나와 같지 않지만, 나는 곧잘 착각하곤 하거든. 몇 가지 공통점만 가지고도 ‘이 사람 나랑 닮았다!’ 내적으로 환호하는. 그런데 언니에게는 그런 착각을 한 적이 없었어. 언니가 짓는 덧없어 보이는 표정, 털털함, 염려하지 않음, 넉살 같은 게 처음에는 불편했어. 무디고 섬세하지 않은 사람 같아 보였거든. 그런데 함께하는 한 달 동안 언니에게 푹 빠지게 되었어. 자연스럽고 솔직하고 생생한 언니가 무심하게 건네는 풍경들이 너무 환했거든. 그 풍경들이 이제는 모두 기억으로 남아있지. 아름다운 기억은  힘이 엄청나. 루이보스티를 맥주로 보게 만들 만큼. 그 풍경 중 하나를 오늘 네게 말하고 싶어.


게스트하우스에서 열리던 저녁 파티는 어떤 게스트가 오냐에 따라 분위기가 꽤나 달라졌어.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느껴질 만큼 조용한 파티도 있었고, 적당히 소란스러운 파티도 있었지. 그리고 다들 흥이 올라 다음 날 깨진 휴대폰이 속출하는 그런 파티도 있었어. 그날은 내가 마지막 유형의 파티를 사흘 내리 겪고 심신이 지쳐있던 때였어.


언니는 고향에 다녀오느라 잠깐 게스트하우스를 비웠다 돌아온 날이었고. 그날 파티는 적당히 소란스러웠지만, 나는 9시가 되기도 전에 벌써 졸리기 시작했었지. 그리고 그날, 언니 고향 동생이 함께 제주로 와서 함께 술자리를 했는데 언니가 내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그 동생 옆만 지키고 있는 게 조금 서러웠던 것 같아. 그래서 조용히 술자리를 빠져나왔어. 그렇게 1분쯤 걸었을까, 뒤에서 타박타박 슬리퍼를 신고 달리는 소리가 났어. 뒤를 돌아보니 언니가 누가 봐도 술에 취한 사람처럼 달려오고 있었어.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조금 믿기지 않기도 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어, 언니가 내 바로 앞까지 올 동안. 언니는 내 앞에 서서 반쯤은 우는 사람의, 반쯤은 술 취한 사람의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


‘민경아, 어디가? 갈 땐 말하고 가야지, 올 땐 그냥 와도 되 는데, 갈 땐 말하고 가야 되는 거야.’


나는 언니를 달래려고 언니 손을 잡고 우리가 자주 앉아서 맥주를 마시던 바닷가 돌상으로 갔어. 엉덩이에 닿던 돌이 차갑고 축축했지만, 잡고 있던 언니 손은 따듯했어. 언니가 나른해져서 이제 들어가 자자고 할 때까지 그날 오래 밤바다 앞에 앉아 있었어. 불빛 한 점 없어서 바다를 보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앞에는 바다가 있었어.


나는 누군가 가장 빛나는 기억을 물어오면 이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려. 한밤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언제나 이 기억을 상기할 때면 사방이 온통 환해지거든.


그래서 결아, 오늘 나는 조금 어려운 질문을 건네보려고 해. 너의 가장 빛나는 기억은 무엇이니? 떠올리면 마음이 환해지는 기억 말이야. (‘가장’이라는 말이 부담스러우면 나처럼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을 알려주어도 좋아.)


*


편지를 쓰는 동안 파란 하늘이 물러가고 어둠이 바깥을 가득 채웠어. 그럼에도 마음에 든 빛은 가실 생각을 하지 않네.  


결, 또 편지할게.  

몸 마음 건강히, 평안히 지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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