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편지, 풍경에 대해서
결에게,
안녕 결, 민경이야.
조용한 밤, 작은 방에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어.
필기감이 부드러워 손에 거의 힘을 주지 않고도 글씨를 쓸 수 있는 펜과, 아귀힘을 조금 필요로 하는 샤프를 놓고 고민하다 샤프를 집었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듣고 싶었거든.
그런데 종이가 부드러운 탓일까? 심 각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글씨 쓰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네. 그래도 한 자 한 자 눌러쓰는 데 공들이는 게 좋아. 편지를 마칠 즈음엔 손가락이 조금 저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사실 벌써 중지에 굳은살이 배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써오던 소설을 탈고했어. 지금은 합평 날짜를 기다리는 중인데, 기대되면서도 불안해. 언젠가 네게 말했듯, 이 소설은 ‘아름다운 것을 누리는 데 환한 사람’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시작되었어. 이야기가, 그 시작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멀리 뻗어나갔는데, 덕분에 나도 즐겁게 쓸 수 있었어. 나는 에세이보다 소설 쓰는 걸 훨씬 더 좋아해. 겹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아는 이야기, 그러니까 결말을 알고 쓰는 글이 지루하게 느껴지더라고. 소설은 내가 만든 세계와 인물에서 시작하지만, 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매번 흥미로워.
바로 다음 소설도 시작해보려고 해. 언젠가 회사 동료가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고 물었던 적이 있거든, 자기 아이 독서지도 선생님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흥미로운 제안이었지만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겁이 났어. 그리고 동료의 아이를 만나본 적도 없었고 말이야. 지금은 그 아이와 세 번 정도 얼굴을 보고 또 함께 놀기도 했어. 어느 날은 아이 왼편에 앉아 오른팔로 품을 만든 채 콩쥐팥쥐를 읽어주었는데, 내 오른팔이 헐거워질 작은 낌새라도 보이면 바로 안전벨트를 고쳐매듯 내 손을 자기 배에 턱 거는 모습에 웃음이 났어. 사랑받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게 사랑스러웠거든. 도전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아서, 색종이로 하트를 접고 있는 아이에게 학 접는 걸 알려준 적이 있는데 몇 달 뒤에 이런 편지를 받았어.
다음에는 달팽이 접는 법을 공부해 가야겠어. (웃음)
아이와 무언갈 나누는 일이 생길 때마다 내 안에 어떤 감정과 생각이 차곡차곡 채워졌고, 이제 아슬아슬 쏟아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어. 그래서 이 이야기를 써보기로 했어. 줄거리는 한 줄로 정리돼.
‘번아웃으로 퇴사한 주인공이 동료의 제안으로 동료 아이의 베이비시터로 일하는 이야기’
이건 수필이 아니니까, 현실과는 다르게 번아웃이라는 설정도 들어가고, 또 독서지도 선생님은 베이비시터가 되었지. 그리고 소설의 등장하는 아이도, 동료도 현실 속에서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닐 거야. 다만, 현실에서 그 아이와 나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뉘앙스와 감정과 아름다움 같은 것들은 소설에 그대로 담아보려고 해.
누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글을 계속 쓰는 거라 이야기한 적이 있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왜 계속 소설을 쓸까? 생각해보았지. 내 경우는 남겨두고 싶은 풍경이 계속 있었기에 소설을 써왔던 것 같아. 어떤 순간을 남기고 싶을 때 사진이나 영상을 찍거나 일기를 쓰잖아. 그런 마음으로 나는 소설을 쓰고 있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 다른 이야기를 빌려 은유하는 편이 더 본질에 가까운 기록법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도 그런 풍경들이 계속 있어 줬으면 좋겠어. 소설 쓰기는 정말 재미있거든.
가끔은 내가 쓰는 이야기가 너무 사소한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무언가를 고발하지도 않고, 정치적이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스스로에게도 너무 작고 진공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하지만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에도 중력과 마찰이 있는 걸 곧 알 수 있지. 내 이야기에 자신이 없어질 때면 식물들이 자라나는, 또는 움직이는 풍경을 떠올리곤 해. 미세하고 속도가 느려 식물은 마치 정물처럼 느껴지기도 해. 실제 정물화에 식물이 많이 담기기도 하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무수한 움직임과 변화가 있어.
고등학생 때 자라는 블루베리를 찍은 타임랩스 영상을 본 적이 있어.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잊히지 않고 계속 그것에 대해 곱씹어 왔지.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열매가 맺혀 우리가 아는 보라색 알맹이가 되는, 어찌 보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영상인데, 꽃이 피고 지는 속도도 모두 다르고 이파리들도 밤낮으로 진동하듯 움직여, 그리고 각 알맹이가 모두 다른 속도로 연둣빛에서 파랑으로 진해지는 풍경도 나는 놀라웠어.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 미세하고, 느리거나 너무 빨라서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하는 마음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타임랩스로 찍어내듯 섬세하게 옮겨내고 싶어.
그래서 결아, 오늘은 네게 풍경에 관한 질문을 건네고 싶어. 타임랩스를 찍듯, 섬세하게 포착해서 네가 오래 곱씹고 있는 풍경에 대해 듣고 싶어.
*
사실 말이야. 이번 편지에서는 유례없이 쏟아진 비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래서 꾹꾹 눌러쓸 샤프를 집어 들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어쩐지 소설 이야기를 하며 말을 빙빙 돌려버린 것 같기도 해. 너무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어서 피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전시되는 재난
희화되는 재난
무너진 컨트롤타워
공감 능력과 수치심을 상실한 의사결정권자들
자본주의라는 합의 아래 가려지는 노동
서울과 다른 지역에 대한 온도 차
죄다 눈을 감고 싶어지는 현실이라, 믿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현실이라, 소설 이야기가 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온지도 모르겠어.
내가 사는 지역에 비가 쏟아지던 저녁, 친구가 뉴스 화면을 찍어 여기 너네 동네 아니냐고 물어왔어. 방 안에서 창문에 부닥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좀 거세네? 하던 나는 그제야 뉴스를 찾아보았어.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SNS 앱 하나를 설치했고, 우리 동네 이름을 검색한 후에야 집 앞 큰 사거리가 침수되었다는 걸, 근방의 4개 역이 운행을 중지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언젠가 산책했던 천이 범람 위험이 있다고 재난 문자가 발송되어 왔고, 일을 마친 친구가 지하철이 멈춰 집에 갈 방법이 묘연하다며 우리 집에 가도 되겠냐고 물어왔지. 자지 않으면 안 될 시간이 될 때까지 SNS를 통해서 여러 지역의 소식을 찾았어. 사람들의 반응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는데, 곧 거기에 동화되어 버려서 무섭다고 생각했어.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 나는 재난 현장을 ‘소비’했던 것 같아.
SNS는 안전하고 재미있는 전시장과 같지. 올리는 이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져. 그날 타임라인에서는 실질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도 있었지만, 재난 현장을 전시하고 희화하는 게시물도 많았어. 후자들을 볼 때 내 안에서 ‘재난의 소비’가 일어났던 것 같아. 소비는 곧 소모야. 소비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지. 하지만 이번 재난은 인재라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재난 이후에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우리에게는 많이 남아있다고 느껴. 그 이야기가 충분치 않은 시점에 그치지 않길 바라고 있어.
*
그럼에도 계절은 가을로 성큼 다가서고 있는 것 같아.
꾹 참고 가을에 들으려고 했는데, 가을 노래를 벌써부터 듣고 있어.
이번 가을에는 오래오래 걷고 싶어서,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발에 잘 맞는 운동화를 찾아보려고 해.
환절기를 아끼지만, 환절기에는 역시 몸도 마음도 틈을 보이기 쉬운 것 같아, 무탈하게 이 시기를 보내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