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그 Sep 08. 2023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네번째 편지, 상처에 대하여

결에게,   


안녕 결아, 민경이야.


결, 혹시 MBTI 좋아하니? MBTI를 얼마나 믿는지, 네 유형은 뭔지에 대한 질문보다 이 질문을 먼저 하는 이유는, MBTI 유형으로 사람을 나누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야.


나는 MBTI로 사람들에 대한 힌트를 얻는 걸 좋아하고 즐기지만, 그 거부감도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 채용 공고에 특정 MBTI는 지원 불가하다는 안내까지 나오는 마당이니까. 하지만 MBTI는 나와 다른 마음을 상상하는 데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걸 종종 잊곤 하잖아. 가끔은 나랑 다른 사람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나도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해.


‘쟤는 왜 저렇게 말하지?’

‘왜 내 말을 이해 못 하지?’

‘나를 좋아한다면 당연히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은 ‘내’가 중심일 때 강해져.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나를 대입하고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상상하며 내린 결론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MBTI를 알게 된 후에 왜 어떤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필요하지 않은지, 훌쩍 훌쩍 바뀌는 대화 주제를 쫓을 수 없는지, 감정보다 다른 무언가가 먼저 발동하는지, 아무런 계획 없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어. ‘다름’을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써 MBTI는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해.


혹시 네가 MBTI 고수라면, 위에 내가 든 예시를 보며 내 MBTI가 무엇인지도 벌써 알아차렸겠지? 나는 INFJ야. 하지만 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종종 헷갈리곤 하거든. 그런데 이번 주에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서 ‘음… 저 모습(INFJ)은 사회화된 모습이구나’ 싶었어. 사실 나는 ENFP인 것 같아. (웃음) 초등학생 때 검사를 했을 때는 이 유형이 나왔었거든.


MBTI는 네 차원의 분류 항목을 조합해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나누는 성격 검사 도구야. 네 가지 차원은 각각 에너지의 방향, 정보 수용 방식, 결정 방식, 외부 세계 대처 방식인데 (말이 너무 어렵지?)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아.


1) 에너지의 방향 : 에너지를 어디에서 얻고 또 어느 방향으로 쓰는지

-외향(E):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에너지를 얻고, 또 타인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데 에너지를 쓴다.

-내향(I): 내부 세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그곳에 에너지를 투입한다.


2) 정보 수용 방식 : 인식한 정보 중 어떤 것을 더 중시하고 선호하는지

-감각(S): 오감을 통해 경험한 것을 정보로 채택하며, 실용적이며 현실적이다.

-직관(N): 상상력이 풍부하며 자신의 영감을 신뢰하는 정보로 여긴다. 변화와 다양성을 선호한다.


3) 결정 방식 : 어떤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는지

-사고(T):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공정성을 중시한다. 분석적이다.

-감정(F): 공감적이고, 배려에 힘을 쓰며 감성적인 것을 선호한다. 조화를 추구한다.


4) 외부 세계 대처 방식 : 외부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판단(J):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생활한다. 삶을 조직화한다.

-인식(P): 유연하고 즉흥적으로 생활한다. 삶을 적응력 있게 받아들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MBTI 검사는 MRI 검사와 다르다는 거야. MRI는 통 안에 들어가 있으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검사 결과가 나오잖아. 반면 MBTI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자기 보고형’ 검사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하긴 어려워. 하지만 이 때문에 더 재미있는 틈이 생기지. 나는 ‘객관적인 나’ 만큼이나 ‘내가 생각하는 나’도 중요하다 생각하거든.


그럼 내가 왜 사회생활을 하며 MBTI가 바뀌었는지 얘기해 볼게. 나는 기질적으로 인간관계에 예민한 편이야. 관계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사회로 나오면서는 싫어도, 불편해도 만나야 하는 관계들이 생기게 되었어. 그리고 주로 그 사람들과 회사에서 하루 종일 함께 하지. (웃음) 그래서 외부 세계에서 에너지를 만들고 또 쓰던 걸 선호하던 성격이(E) 이런 식이라면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조용하고 안전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에너지를 쌓는 걸 선호하는 성격(I)으로 옮겨가게 된 거지.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는 동네를 탐방하며 길 잃어버리기를 좋아하고,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고, 계획이 틀어지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P) 어른이 되고 나서는 책임질 일이 많았고, 그게 나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에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시간을 정돈하는 일에 힘쓰는 성향(J)을 가지게 되었어.


INFJ로서 지내는 날들은 꽤나 만족스러워. 하지만 가끔 ‘이건 내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 아까 말했듯이 이번 주에는 내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깨워주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어. 아주 편하고 안전한 기분이었지.


수요일에 만난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 H였어. 나는 경북 산골에 있는 전교생 270명 기숙사 고등학교에 다녔거든. 그곳에서 친구들과 24시간 함께하며 자각도 없이 그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며 지냈어. 물론 엉엉 울며 싸우기도,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기도 했지만. 그곳을 떠난 지금 생각해보면 다 사랑 같아.


그 시간이 소중해서, 작은 유리병에 담아 놓고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학생 때는 그곳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쓰기도 했어. 영원하지 않음이 오로지 슬픔으로 읽히는 장소와 시간이었거든. H는 그 연극을 보러 와서 가방에 있던 수면 바지로(그날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었거든) 터져버린 눈물을 닦았어. 그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며 또다시 눈물이 터진 H 앞에서 나는 한참을 웃었었지. 그때를 아직 기억해. 그리고 영원히 기억할 거야.


그 연극의 제목은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였어. 나에게 장마란 ‘피할 수 없는 모든 것’의 상징이야. 우산을 써도 등허리와 다리에 빗물이 감기던 어느 장맛날, 한숨을 작게 내쉬며 우산을 살짝 뒤로 젖혀 비를 맞아본 적이 있어. ‘이렇게 내리는 비는 피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날이지.


피할 수 없는 게 빗줄기라면, 심한 감기 한번 앓는 게 가장 큰일이겠지만. 음…그 날 나는 비가 아닌, 살면서 내가 피할 수 없을 것들을 떠올리며 조금 울었던 것 같아, 무서웠거든.


그 무수한 장마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단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야. 우리는 사람이니까 언젠가 죽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고.


대처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연극 이름을 <장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로 짓고 아직 잃어보지 않은 친구들을 연극 안에서 잃어보았어. 그리고 나름의 대처 방식도 상상해보았지.


서로를 미리 잃어보았으니, 잃지 않았는데도 잃음을 경험해보았으니, 잃게 되더라도 잃지 않음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있었어. 그런데 극을 올리고 난 후 알았지. 그럼에도 언젠가 찾아올 잃음은 정직할 것이라는 걸.


그래도 연극을 올린 후에 마음이 조금 더 용감하고 단단해진 것은 맞아. 혼자 끙끙 앓으며 가지고 있었던 마음을 무대에 올렸고, 그 이야기를 건네받고 우는 관객들을 보았으니까. 그게 내 마음의 힘이 되었어.


예전처럼 매일같이 누군가의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어. 그래도 씩씩한 다짐으로 마음을 정리했어.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깊이 사랑해야겠다는 다짐. (웃음)


오늘은 MBTI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너의 본 모습이 자유롭게 흘러나오는 ‘안전 기지 같은 관계’에 대해 물으려 했었거든. 그런데 이제 알겠지? 나 N인 거(웃음). 예상치도 못하게, 아껴두었던 장마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네.


그래서 결아, 오늘은 너의 장마에 대해 묻고 싶어.

네가 피할 수 없다 여기고 있는 무언가 말이야.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는 너의 방식, 마음의 모양도 함께 알려주면 좋겠어.


*


낮 기온이 30도를 넘긴지 꽤 되었지만, 그간 ‘여름이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이번 주, 한낮의 뭉게구름들을 보면서, 발갛게 익은 노을을 보면서 ‘여름이다’라는 생각을 했어.


내리쬐는 볕은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까운 곳에 항상 나무그늘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 여름을 지내보려 해.


우리의 여름이 안전하고 다정하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




추신1. 나의 장마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어서, 내가 연극이 끝난 후에 H에게 썼던 편지의 일부를 함께 보내.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로 하여금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야. 오래 곁에 머물고 싶은 고마운 사람. 그래서 잃을 게 너무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좋아하기로 결심한, 내가 맞기로 한 장마야.’


추신2. MBTI 소개를 할 때 참고한 책은 김재형 저자의 <당신이 몰랐던 MBTI>야.

이전 04화 오래 간직해온 풍경이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