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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Sep 08. 2023

사랑하는 사람이 두려워질 때

다섯번째 편지, 사람에 대하여

결에게,


안녕 결, 민경이야.

이번 주도 독서실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써. 지난주의 경험이 꽤나 만족스러웠나 봐. 조용히 하기로 약속한 이곳이, 그럼에도 물을 마시는 소리나 발자국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숨길 수 없는 이 공간이 마음에 들어.


나는 민감한 편이야.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 마주하는 자극들을 세세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 일상이 조금 더 깊고 풍부해지는 건 좋지만, 무언가 조금 덜 느끼고 싶을 때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건 버거운 일이지. 지금도 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닿는 느낌과 왼편 조명이 미세하게 깜빡이는 걸 신경 쓰고 있어. 예전 같으면 자리 운이 없다며 다른 곳으로 옮겼겠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아. 요가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해. 요가를 하다 보면 낯선 자극을 자주 마주치거든, 그럴 때 '아.. 이거 아닌데? 뭔가 잘못됐는데?' 싶다가도 들숨날숨하며 잠깐 있다 보면 익숙해지고 가끔은 시원하기도 해. 그래서 요즘은 명백하게 나쁜 자극이 아니라면 그냥 그걸 마주 보는 일이 많아졌어.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작은 단서에도 불안을 느끼고 조급해져. 무언가를 유보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 가령,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같은 말을 못 견디는 편이야. 여전히 그런 말은 힘들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무것도 결론짓지 못한 밤에도 잠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 난해한 요가 동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어려운 마음 앞에서 쉽게 그것을 버리려 하지 않아. 그게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비겁하지 않은 방식이란 걸 이제 조금 이해한 것 같아.


결, 이번 주 나에게는 두 가지 특별한 만남이 있었어. 하나는 오래 좋아했던 작가님의 북토크를 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한 인터뷰였어. 이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최은영 작가님은 나를 가장 많이 울린 작가님이야. 작가님이 쓰신 작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약간 목구멍이 먹먹해졌어. 작가님의 책을 읽다 보면 인물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져 그리고 절정의 순간엔 마치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울게 돼. 울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 작가님이 주는 울음은 언제나 선물 같아. 우울로 가게 하는 울음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올 수 있게 하는 울음.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 작가님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 덕분인 것 같아. 내가 느끼는 감정이 가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책감이나 수치심, 오만, 두려움 같은 것이 끼어들어 감정으로부터 소외되곤 해. 그러면 그 감정은 내 것도 아니면서 유령처럼 나를 맴돌아, 그리고 약해진 틈을 타 나를 공격하지. 작가님의 글은 그런 감정과 나 사이의 매듭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풀어줘. 그 감정이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게 해 주지. 나는 <한지와 영주>라는 작품과 <모래로 지은 집>이라는 작품을 특히 좋아해. 너에게도 한 문장을 적어 보내.


"걔랑 같이 밥을 먹어도, 같이 길을 걷고 이야기하고 웃어도 괴로웠어. 우리의 마음이 너무 달라서 외로웠어. 마음이라는 게 사그라지기를 바라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그 마음이 사라질까 봐 겁이 났어. 아무리 나를 괴롭게 하더라도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 마음을 잃은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단지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외로워지기 싫어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서 진짜 마음 하나 없이 함께하는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게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이었는데.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까."


북토크에서는 작가님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자기혐오를 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셨고, 지금은 그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이야기해주셨지. 그 역사를 내가 몇 줄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는 일'이라고 말하시는 것 같았어. 작가님은 상담받으셨던 이야기를 길게 해 주셨는데, 상담사 선생님이 '어떻게 사람한테 그럴 수 있냐고' 작가님을 다그치셨대. 앞 문장에서의 '사람'은 바로 작가님 자신이고. 그리고 상담을 종결하는 날 작가님의 '선생님, 저는 이제 저를 비난하지 않아요'라는 말에 상담사 선생님이 우셨다고 해. 작가님이 좋은 상담사를 만나신 것 같아 기쁘고 찡했어. 


이제 두 번째 만남에 대해 이야기할게. 나는 '인터뷰 놀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거든. 말 그대로 인터뷰를 놀이처럼 하는 거야.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질문들을 작은 질문지로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놀이야. 가까운 지인부터, 지인의 지인 그리고 아주 낯선 사람과도 종종 하고 있어. 이번 주에 만난 분은 온라인으로 진행된 워크숍에서 알게 되었어. 그날 유난히 수줍어 워크숍에서 말을 잘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사람들에게 인터뷰 놀이를 홍보했는데 그분이 연락을 주셨어.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인터뷰 놀이를 쉬었는데 그 오랜 정적을 낯선 이와의 대화로 깨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나는 내 매력이 사람들의 유머 코드를 빠르게 파악하고 적절한 농담을 던지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긴장하면 매력 발산이 하나도 안 된다는 단점이 있는데, 그 점이 가장 걱정되었어. 그런데 (그분은 너무 미안해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인터뷰이가 무언가 두고 오는 바람에 약속 장소로 오던 중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그 시간 동안 인터뷰 장소와 친해지고, 질문도 돌아보고 차도 마시며 마음을 정비할 수 있었어. 그래서 아주 재밌는 인터뷰 놀이를 할 수 있었지. 


물론 재밌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긴장을 안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인터뷰이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었어. 그리고 활짝 열린 문처럼 솔직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 앞에서는 나도 무장해제를 하게 되지. 


인터뷰 놀이를 하면서 속으로 '역시 제일 재밌는 건 사람 마음이야'라고 생각했어.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저마다 다른 게 너무 재미있어. 다른 마음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 안에 풍성한 이야기가 넘치고 있는 게 나를 두근두근하게 만들어. 인터뷰 놀이를 계속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겠지. 그래서 어릴 때도 백문백답 읽는 걸 그렇게나 좋아했어.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지. 관계에서 상처가 발생하는 이유 또한 사람들의 마음이 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마음이든 '그럴 수 있지'하고 넘겨 버릴 수 있는데, 가까운 사람이 나와 너무 다른 생각, 그것을 넘어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마음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 같아. 지금은 진행 중인 상처가 없어서 '그래도 재밌는 건 못 참지!'라는 말이 쉬이 떠오르지만, 지나온 상처를 떠올리면 머리가 아찔해지는 걸 보니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오늘은 너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어. 네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네게 상처가 되는 생각이나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너는 어떻게 하는지, 어떤 마음이 드는지 말이야. 


결, 나는 사람이 무섭고 밉고 끔찍해.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대부분의 존재는 사람이야. 그리고 무섭고 끔찍한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계가 그리 분명하지 않다는 걸, 그 두 집단이 언제든 쉽게 섞이곤 한다는 걸 이제 알아. 이 모순을 예전에는 해결해보려 하기도 했었는데(아주 냉소적으로 살기를 다짐하거나 밝은 모습만 보자고 다짐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야) 그럴 수 없다는 걸 이제 받아들였어. 그래서 나에게는 아주 많은 질문들이 생기게 되었지. 오늘 너에게 건넨 질문도 그중 하나인 것 같아. 


여름이 훌쩍 다가온 기분이 들어.

나는 여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예쁜 부채를 하나 사려고 해.

너는 여름을 어떻게 준비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우리 여름에도 계속 편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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