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그 Sep 08. 2023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어

일곱번째 편지, 믿음에 대해서

안녕 결, 민경이야.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어. 사실 그날에 며칠 앞선 날들부터 미묘하게 일상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지. 마치 내 손끝과 발끝이 어디까지인지 잊은 사람처럼 자꾸 다치곤 했어. 침대맡에 부딪혀 발톱이 부러지고, 책상을 걷어차 멍이 들고, 손을 잘못 놀려 끝이 베이곤 했어. 그 모든 일은 내 방 안에서 일어났어. 낯선 곳에서도 잘 다치지 않는 편인데, 익숙하고, 내게 최적화된 공간에서 자꾸 피를 보게 되는 게 참 이상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목이 심상치 않았어. 며칠 동안 미세먼지가 극심했기에 그 탓이라 생각했지만 혹시? 하는 생각에 잠깐 외출을 망설이기도 했지. 그럼에도 약속을 취소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바깥으로 나갔어.


버스정류장까지 갈 때 항상 걷던 큰 길이 그날따라 벅차게 느껴졌어. 자연스레 샛길로 발걸음이 빠졌어. 골목에 들어서자, 손수레에 삼다수 2L 여섯 묶음, 오렌지 주스, 사이다를 싣고 그것을 위태롭게 끌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어. 우리의 거리는 점차 좁혀졌어. 그 골목의 중간 지점에는 30도 정도 되는 경사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어. 천천히 걸으며 곁눈질을 하다가 할아버지를 스쳐 지나갔어. 그리고 몇 걸음 못 가 뒤를 돌아보고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어.


- 이거 제가 끌어드릴까요?


같은 말을 건넸던 것 같아. 한숨을 한번 폭 내쉬며 숨을 고르시더니, 할아버지는 잠깐 망설이셨어. 그때는 그 망설임의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건 미안함 때문이었던 것 같아. 할아버지는 그럼 저 앞까지만 부탁한다며 급히 걸음을 옮기셨어. 나는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걷는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너무 불안해서, 천천히 가세요! 천천히! 저 시간 많아요! 라고 외쳤지.


결국 할아버지는 몇 걸음 못 가셔서 넘어지셨어. 넘어지셨다기보다는 다리에 힘이 풀리셨는지 앞으로 내려앉듯 고꾸라지셨는데, 시멘트 바닥에 코가 쓸려 새끼손톱 반 만한 상처에서 피가 났어. 입술도 쓸리셨는지 피 섞인 침을 뱉어내셨지. 피를 보고 놀라서 경찰을 불러야 하나, 119를 불러야 하나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피를 슥슥 닦으며 다시 일어나셨어. 그리고 몇 걸음 앞에 있는 집 대문을 열어주셨지.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1층과 2층이 있어 어디가 댁이냐 물어보았지. 할아버지의 대답이 흐릿해서, 2층이세요? 여쭈니 고개를 끄덕이시고, 1층이세요? 여쭈니 ‘으응’ 하셔서 삼다수는 2층에 올려두고 음료는 그대로 수레에 두었어. 얼굴의 상처를 보려고 계단에 앉아계시는 할아버지 앞에 쪼그려 앉았어.


그때 마주한 할아버지의 눈에서 내가 읽은 감정은 슬픔이었어. 그리고 이 슬픔에는 내가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피가 난 곳은 괜찮으신지, 혹시 가족 분들이 있는지 여쭈었더니 괜찮다고, 곧 누군가 내려올 거라고 흐릿하게 대답하셨지. 그 말에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정리하고 바깥으로 나왔어. 그럼 저는 가보겠다는 말에 죄송하다는 할아버지의 대답이 귓가에 웅웅 울렸어. 주변 소음이 흐려지고, 머리가 조금 아팠어. 집으로 돌아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이럴 때 혼자 있는 건 별로일 것 같아서 약속 장소에 나갔어.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할아버지가 다치신 게 내 잘못인 것 같다는, 답도 없는 얘기를 꺼내니, 앞에 앉은 동료가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어.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된다면서, 그냥 자기는 단지 요즘에는 누굴 도와주고 되레 신고당하는 일이 있으니, 내 말을 들으며 그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말해주었어. 내게 정방향으로 다가온 다정이었지만, 그 말을 앞으로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말끔해지진 않았어.


집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니 자꾸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어. 기억이 왜곡되는 것 같아서 그 이미지를 지우고, 할아버지 코에 난 상처에 딱지가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했어. 그러니 마음이 조금 괜찮아졌어. 그리고 나니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난 그 골목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도 700m는 떨어진 곳에 있는데 어떻게 혼자 오신 건지. 그날이 처음이셨던 건지, 배달이 된다는 건 모르셨던 건지. 그런 게 궁금했어.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그 나이에 생기는 고집 때문에 혼자 길을 나서셨을 거라는 동료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나는 언젠가는 정치를 하고 싶어.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그 생각이 강해지는 것 같아.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흘렀던 것 같은데, 이제는 마음이 흐르는 길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해.


*


그날 밤부터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 그리고 다음 날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지. 오늘은 3일 차인데, 두통, 코막힘을 거쳐서 이제 목이 많이 부어 있는 상태야. 두통이 가신 후로는 그래도 참을 만한 것들이라 다행히 이 편지도 쓸 수 있게 되었지.


가족들은 결혼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나를 보고, 그래도 나중에 나이 들어 아프면 보호자가 꼭 필요하다고, 마음을 다시 가져보라고 종종 말하곤 하셔. 타지에 나와서 이번처럼 격리된 채 아팠던 적은 처음이라 그 말이 조금 와닿긴 했는데, 역시나 그런 마음이 앞선 채로 결혼에 접근하는 건 달갑지가 않아. 그리고 그것보다도, 모든 돌봄을 개인의 영역으로 두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


지난달에는 정부가 치매 노인 관련 예산을 삭감했다는 기사를 보았어. 이 편지를 쓰다가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져 기사를 찾아보았어.


“2023년도 정부 예산 분석자료(보건복지부 작성)를 보면, 치매관리체계 구축 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약 1898억원으로 올해 약 2077억원보다 179억원(8.6%)가량 줄었다. 그중 치매안심센터 운영 예산은 올해 1808억원에서 9.5% 줄어 1636억원이 배정됐다. 치매전담형 노인요양시설 예산은 498억원에서 327억원으로, 양로시설 및 요양시설 증개축과 개보수 사업도 114억원에서 74억원으로 줄었다.”(한겨례, '윤 정부, 어르신 ‘치매 지원’ 줄인다…말 따로 예산 따로' 中)


예산 삭감의 당위는 예산 집행률이 떨어졌기 때문인데, 실무자들은 그것이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이라 설명했지. 하지만 숫자 뒤에 있는 이야기가 불필요하다 생각했는지 예산은 삭감되었어. 나는 숫자보다 그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이야기를 더 섬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 곁으로 모이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그런 이야기가 앞으로 내게도 필요할 것 같아서(아무래도 정치를 하려면!), 요즘은 이야기를 많이 모으는 중이야.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직접 듣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나 유튜브 영상을 보기도 해.


여러 이야기 속에 살다 보면, 가끔 내 마음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될 때가 있어. 그걸 몰라서 어디 가서 부딪히기도 하고, 피를 보기도 하지만 그게 나쁘지만은 않고, 사실 좋을 때도 많아.


내 손끝과 발끝에는 아무리 내가 헷갈려 해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으니까. 이야기의 힘을 빌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


*


결, 그래서 오늘은 네가 최근에 접한 이야기 중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어. 조금 더 정확하고 어렵게 묻자면, 네가 믿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는지 궁금해. 옛날이야기를 하듯 풀어 이야기해주어도 좋고, 그것이 문학이나 영화, 만화, 드라마 등의 작품이라면 이름을 알려주어도 좋을 것 같아.


*


그럼 결아, 이번 한 주도 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자주 마주하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마무리할게.


늘 건강하길.

이전 07화 사람을 '소유'한다는 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